옛 문인들의 사교장, 호남의 정자(亭子)들
▲ 당대 문인들의 사교장, 면앙정(人+免仰亭)
무등산(无等山)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쳐 있어
멀리 떨어져 나와 제월봉(齊月峯)이 되었거늘
끝없이 넓은 들판에 무슨 생각하느라
일곱 구비 한 데 움쳐 무더기 무더기 벌여 놓은 듯
가운데 구비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곧 깨어 머리를 얹은 듯.
너럭바위(반석, 盤石) 위를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靑鶴)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면앙정가’ 앞부분. 현대어로 옮김)
면앙정은 조선 중기 송순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그가 41세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면앙(人+免仰)’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라는 뜻인데, "이 언덕에 정자를 지으니, 그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과 시내를 끌어들여 즐기니, 나의 여생을 마치는 데 충분하다."고 하여 '면앙정가'를 지어 정자 이름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고, 1654년(효종 5)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남향하고 있으며, 가운데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처마도 덧붙이지 않은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참나무, 밤나무, 대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아름드리나무도 간간이 서 있다. 전망은 뒤편 서북쪽 평야 너머로 연산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과 제월봉 사이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기다란 강줄기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이 물줄기는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송강정 앞 물길로 이어지며 이 물줄기는 다시 영산강으로 이어진다.
송순(宋純, 1493~1583)은 호를 면앙정(人+免仰亭), 또는 기촌(企村)이라 했고, 27세에 급제하여 대사헌, 한성부 판윤, 우참찬 등을 지냈다. 농암 이현보의 후배이자 퇴계 이황의 선배로 음률에 정통하여 현금(玄琴)을 잘 탔다고 한다. 벼슬을 버리고 하향, 전남 담양의 면앙정과 석림정사를 짓고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며 당대 최고의 문인 정철, 임제, 기대승과 교류하였다. '면앙정가'는 강호가도(江湖歌道)를 확립한 노래로,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의 계통을 이었고,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남긴 시는 자신의 정의감과 비판의식이 깃들어 있는가 하면, 자연과 낭만을 노래한 순수시까지 다양하다. 또 사회악을 풍자하고 고발하는 대표적인 참여시도 그의 문학정신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연이은 사화와 봉변, 붕당의 싸움이 계속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회변동이 극심한 그 때, 피폐한 백성의 삶을 고발했던 것이다. 그 동안 송순이 가사문학의 개척자로 풍류를 즐기는 시객 정도로 알고 있던 후세들에게 그가 참여시인적인 현실 투시나 고발을 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면앙정'의 '면'자가 안 떠서 어쩔 수 없이 '人+免'으로 표기했음)
▲ ‘사미인곡(思美人曲)’의 산실, 송강정(松江亭)
내가 이 주변에 올 때마다 즐겨 찾았던 '면앙정'은 안개로 시간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생략되었고, 5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송강정'을 찾았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西人) 진영에 속했던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49세 되던 해인 1584년(선조 17),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 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냈다. 그는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아가기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긴 곳이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자,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져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송강의 후손들이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를 심어, 1770년(영조 46)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을 죽록천(송강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므로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다. 길옆으로 비스듬히 놓은 계단을 오르니,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그 뒤로 대나무들이 담처럼 둘러져 있다.
정철이 담양 창평 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명종)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등, 유복하게 지내던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10살 먹던 해(명종 원년, 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그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곳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여섯 살 먹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 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웅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의 자질을 길렀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는 계기가 되었다.
동서 붕당으로 갈려 치고받던 시절, 어느 편에도 서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른 말을 잘 했던 송강의 정치적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었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싸움에서 밀릴 때마다 자신을 키운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왕에 대한 그리움, 자연에 대한 찬탄, 고요한 생활에 대한 동경 등을 토로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깊이 했다. 평생 권력을 추구하며 정적들에게 매서운 칼날을 들이댄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때로 다정다감한 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인으로 두 얼굴을 가진 송강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초야에 묻혀 살 계획 이미 정해져 / 세모(歲暮)엔 내 장차 떠나가리라 / 늘 원하건데 물고기가 되어 / 깊은 물밑에 잠기고 싶다……”고 노래하며,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송강은 권력에 빌붙어 조용히 물러갈 때를 모르고, 손을 비비며 추한 꼴을 보이는 요즘의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정신을 물려받았음인가. 근래에 들어 호남 출신 시인들이 앞장서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저항시, 민중시, 참여시를 통해 정치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희구(希求)하고 있음은.
▲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소쇄원(瀟灑園)
은근히 매화꽃을 기대하며 주차장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 소쇄원 초입에 들어섰는데, 매화는 아직 그 입을 다문 채 터질 듯한 봉오리를 매달고 있었다. 대신 소슬 바람에 서걱이는 청아한 댓잎 소리만이 오랜만에 방문하는 나를 맞는다. 언젠가 이곳을 지날 때 눈의 압력으로 와지끈 대나무 꺾이는 소리에 놀란 일이 있다. 그 곧기라든가 차라리 꺾일지언정 굽힐 수 없다는 대나무의 속성 때문에 옛 사람들은 사군자(四君子)로 삼은 것이다. 선비들의 후원에 왜 대나무를 심는지 이제 알겠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住居)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구역은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등 모두 22종에 이른다. 이곳저곳에 산수유와 매화가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어 있어, 답사 일정을 일주일 뒤로 미루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소쇄(瀟灑)'라는 말은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홍진을 뛰어넘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남북조시대 제나라 사람이던 공치규의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맑고 시원하다는 뜻을 가진 위의 말은 훌륭한 학덕과 고매한 인품을 가졌으면서도 속세와는 거리를 두고 숨어 지내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소쇄원은 제주양씨 양산보의 후손들이 15대에 걸쳐 보호 관리하고 있어 그나마 과거의 정취를 간직하게 해 주고 있다. 담장에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문패를 다시 바라보면서 여름에 한번 들르리라 다짐하고 돌아 나왔다.
▲ 송강의 ‘성산별곡’의 산실, 식영정(息影亭)
소쇄원에서 나와 얼마 되지 않은 곳 길가 언덕에 식영정은 자리 잡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하면 '그늘에서 쉬어가는 정자'인 셈이다. 오른쪽으로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비를 바라보며, 서둘러 계단으로 오르니 눈앞에 광주호의 시원한 물줄기가 펼쳐진다. 정자 주변에 몇 그루의 배롱나무가 서있는 걸 보면, 이곳이 자미탄(紫薇灘)이었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주호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배롱나무 꽃이 피어 있는 여울(자미탄)’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10여리에 달하는 마을이었다. 그 삶의 터전이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물속에 잠겨버리는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곳이다.
식영정은 송강정과 함께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任億齡, 1496~1568)을 위하여 1560년에 지은 것으로, 무등산 원효계곡 자락을 타고 흘렀던 문화의 극치를 이루는 현장이었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석천이 장주(莊周)의 그림자에 대한 고사를 인용하여, '그림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만 정작 밤이 되거나 그늘에서는 따라붙지 못함의 예를 들어 인간도 그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혹은 온화의 상징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니, 이제 모든 것에 초탈하고 강호에 은거하여 자기 연마에 힘쓰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라 한다.
석천은 65세에 이곳 성산에 들어와 73세 때 해남 집으로 돌아가 운명할 때까지 주로 식영정에 은거하면서 성산동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여유로운 삶을 시로 그렸다. 그의 시는 총 2,300여 수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400여수가 성산에서 생활했던 8년 동안에 창작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식영정에서의 생활은 시성(詩聖)의 경지에 이르는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김성원은 식영정 바로 옆에 본인의 호를 딴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 등 성산 일대의 화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 '성산별곡'을 썼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宋純), 김인후(金仁厚), 기대승(奇大承) 같은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白光勳), 송익필(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식영정 옆에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72년에 부속 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지금까지 돌아본 정자들은 딱히 어떤 종류의 건축으로 구분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적 의미와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문화가 싹트고 뿌리내리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소이자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고 덕망 높은 스승의 숭모처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정자는 그 시절의 정신과 예술적 향기는 사라져 빈집의 퇴락함으로 남아 있지만, 죽장에 삿갓 쓰고 자연을 벗하며 살던 옛 선비들의 체온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2002. 2. 22. 16:00>
<사진> 위는 소쇄원이고, 아래는 식영정입니다.
▲ 당대 문인들의 사교장, 면앙정(人+免仰亭)
무등산(无等山)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쳐 있어
멀리 떨어져 나와 제월봉(齊月峯)이 되었거늘
끝없이 넓은 들판에 무슨 생각하느라
일곱 구비 한 데 움쳐 무더기 무더기 벌여 놓은 듯
가운데 구비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곧 깨어 머리를 얹은 듯.
너럭바위(반석, 盤石) 위를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靑鶴)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면앙정가’ 앞부분. 현대어로 옮김)
면앙정은 조선 중기 송순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그가 41세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면앙(人+免仰)’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라는 뜻인데, "이 언덕에 정자를 지으니, 그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과 시내를 끌어들여 즐기니, 나의 여생을 마치는 데 충분하다."고 하여 '면앙정가'를 지어 정자 이름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고, 1654년(효종 5)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남향하고 있으며, 가운데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처마도 덧붙이지 않은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참나무, 밤나무, 대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아름드리나무도 간간이 서 있다. 전망은 뒤편 서북쪽 평야 너머로 연산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과 제월봉 사이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기다란 강줄기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이 물줄기는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송강정 앞 물길로 이어지며 이 물줄기는 다시 영산강으로 이어진다.
송순(宋純, 1493~1583)은 호를 면앙정(人+免仰亭), 또는 기촌(企村)이라 했고, 27세에 급제하여 대사헌, 한성부 판윤, 우참찬 등을 지냈다. 농암 이현보의 후배이자 퇴계 이황의 선배로 음률에 정통하여 현금(玄琴)을 잘 탔다고 한다. 벼슬을 버리고 하향, 전남 담양의 면앙정과 석림정사를 짓고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며 당대 최고의 문인 정철, 임제, 기대승과 교류하였다. '면앙정가'는 강호가도(江湖歌道)를 확립한 노래로,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의 계통을 이었고,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남긴 시는 자신의 정의감과 비판의식이 깃들어 있는가 하면, 자연과 낭만을 노래한 순수시까지 다양하다. 또 사회악을 풍자하고 고발하는 대표적인 참여시도 그의 문학정신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연이은 사화와 봉변, 붕당의 싸움이 계속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회변동이 극심한 그 때, 피폐한 백성의 삶을 고발했던 것이다. 그 동안 송순이 가사문학의 개척자로 풍류를 즐기는 시객 정도로 알고 있던 후세들에게 그가 참여시인적인 현실 투시나 고발을 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면앙정'의 '면'자가 안 떠서 어쩔 수 없이 '人+免'으로 표기했음)
▲ ‘사미인곡(思美人曲)’의 산실, 송강정(松江亭)
내가 이 주변에 올 때마다 즐겨 찾았던 '면앙정'은 안개로 시간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생략되었고, 5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송강정'을 찾았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西人) 진영에 속했던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49세 되던 해인 1584년(선조 17),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 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냈다. 그는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아가기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긴 곳이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자,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져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송강의 후손들이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를 심어, 1770년(영조 46)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을 죽록천(송강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므로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다. 길옆으로 비스듬히 놓은 계단을 오르니,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그 뒤로 대나무들이 담처럼 둘러져 있다.
정철이 담양 창평 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명종)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등, 유복하게 지내던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10살 먹던 해(명종 원년, 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그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곳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여섯 살 먹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 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웅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의 자질을 길렀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는 계기가 되었다.
동서 붕당으로 갈려 치고받던 시절, 어느 편에도 서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른 말을 잘 했던 송강의 정치적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었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싸움에서 밀릴 때마다 자신을 키운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왕에 대한 그리움, 자연에 대한 찬탄, 고요한 생활에 대한 동경 등을 토로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깊이 했다. 평생 권력을 추구하며 정적들에게 매서운 칼날을 들이댄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때로 다정다감한 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인으로 두 얼굴을 가진 송강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초야에 묻혀 살 계획 이미 정해져 / 세모(歲暮)엔 내 장차 떠나가리라 / 늘 원하건데 물고기가 되어 / 깊은 물밑에 잠기고 싶다……”고 노래하며,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송강은 권력에 빌붙어 조용히 물러갈 때를 모르고, 손을 비비며 추한 꼴을 보이는 요즘의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정신을 물려받았음인가. 근래에 들어 호남 출신 시인들이 앞장서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저항시, 민중시, 참여시를 통해 정치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희구(希求)하고 있음은.
▲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소쇄원(瀟灑園)
은근히 매화꽃을 기대하며 주차장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 소쇄원 초입에 들어섰는데, 매화는 아직 그 입을 다문 채 터질 듯한 봉오리를 매달고 있었다. 대신 소슬 바람에 서걱이는 청아한 댓잎 소리만이 오랜만에 방문하는 나를 맞는다. 언젠가 이곳을 지날 때 눈의 압력으로 와지끈 대나무 꺾이는 소리에 놀란 일이 있다. 그 곧기라든가 차라리 꺾일지언정 굽힐 수 없다는 대나무의 속성 때문에 옛 사람들은 사군자(四君子)로 삼은 것이다. 선비들의 후원에 왜 대나무를 심는지 이제 알겠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住居)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구역은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등 모두 22종에 이른다. 이곳저곳에 산수유와 매화가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어 있어, 답사 일정을 일주일 뒤로 미루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소쇄(瀟灑)'라는 말은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홍진을 뛰어넘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남북조시대 제나라 사람이던 공치규의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맑고 시원하다는 뜻을 가진 위의 말은 훌륭한 학덕과 고매한 인품을 가졌으면서도 속세와는 거리를 두고 숨어 지내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소쇄원은 제주양씨 양산보의 후손들이 15대에 걸쳐 보호 관리하고 있어 그나마 과거의 정취를 간직하게 해 주고 있다. 담장에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문패를 다시 바라보면서 여름에 한번 들르리라 다짐하고 돌아 나왔다.
▲ 송강의 ‘성산별곡’의 산실, 식영정(息影亭)
소쇄원에서 나와 얼마 되지 않은 곳 길가 언덕에 식영정은 자리 잡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하면 '그늘에서 쉬어가는 정자'인 셈이다. 오른쪽으로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비를 바라보며, 서둘러 계단으로 오르니 눈앞에 광주호의 시원한 물줄기가 펼쳐진다. 정자 주변에 몇 그루의 배롱나무가 서있는 걸 보면, 이곳이 자미탄(紫薇灘)이었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주호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배롱나무 꽃이 피어 있는 여울(자미탄)’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10여리에 달하는 마을이었다. 그 삶의 터전이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물속에 잠겨버리는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곳이다.
식영정은 송강정과 함께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任億齡, 1496~1568)을 위하여 1560년에 지은 것으로, 무등산 원효계곡 자락을 타고 흘렀던 문화의 극치를 이루는 현장이었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석천이 장주(莊周)의 그림자에 대한 고사를 인용하여, '그림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만 정작 밤이 되거나 그늘에서는 따라붙지 못함의 예를 들어 인간도 그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혹은 온화의 상징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니, 이제 모든 것에 초탈하고 강호에 은거하여 자기 연마에 힘쓰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라 한다.
석천은 65세에 이곳 성산에 들어와 73세 때 해남 집으로 돌아가 운명할 때까지 주로 식영정에 은거하면서 성산동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여유로운 삶을 시로 그렸다. 그의 시는 총 2,300여 수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400여수가 성산에서 생활했던 8년 동안에 창작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식영정에서의 생활은 시성(詩聖)의 경지에 이르는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김성원은 식영정 바로 옆에 본인의 호를 딴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 등 성산 일대의 화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 '성산별곡'을 썼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宋純), 김인후(金仁厚), 기대승(奇大承) 같은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白光勳), 송익필(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식영정 옆에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72년에 부속 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지금까지 돌아본 정자들은 딱히 어떤 종류의 건축으로 구분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적 의미와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문화가 싹트고 뿌리내리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소이자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고 덕망 높은 스승의 숭모처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정자는 그 시절의 정신과 예술적 향기는 사라져 빈집의 퇴락함으로 남아 있지만, 죽장에 삿갓 쓰고 자연을 벗하며 살던 옛 선비들의 체온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2002. 2. 22. 16:00>
<사진> 위는 소쇄원이고, 아래는 식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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