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그윽한 예술의 향기를 따라 (2)

김창집 2003. 3. 5. 22:41
탐라문화보존회 호남서남부 답사기

(개암사 대웅전과 울금바위)


▲ 변한의 왕궁터였던 개암사(開巖寺)

13:50. 점심을 먹고 나서 개암사로 향했다. 보안에서 부안을 향해 올라가다, 보은에서 개암
저수지를 돌아 올라가니, 멀리 울금 바위가 보이고 그 아래 개암사가 고즈넉이 앉아 있다.
3시까지 오라는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들어서는데, 몸체가 움푹 패일 정도로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아는 체를 한다. 원래 이 절터는 변한의 왕궁터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은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해 이 곳에 성을 쌓으면서 우와 진 두
장수를 보내 감독하게 하고 좌우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지은 후 동쪽 것은 묘암, 서쪽 것은
개암이라 불렀다.

이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로 634년(우왕 35) 백제의 묘련(妙
漣)이 창건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곳에 머물면서 676년에 중수하였
다. 1314년(고려 충숙왕1)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지금의 자리에 중창하여 대사찰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으며, 1783년(정조7) 승담(勝潭)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날개를 활짝
벌리고 막 날아오르려는 자세로 앉아 있는 대웅전은 보물 제292호로,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건물 규모에 비해 굵은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우주(隅柱)는 더 굵
다. 배흘림이 없는 직선의 둥근 기둥인데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민흘림기둥이다. 단청을
쓰지 않아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울린다.

한쪽 매장 건물에서는 이 절에서 고유하게 내려오는 방식으로 만든 개암죽염을 팔고 있다.
개암죽염은 무려 1,3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데, 신라중기의 고승인 진표율사가 개암
사를 찾아왔다가 울금바위의 동굴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죽염의 비법을 깨우쳐 이를
개암사 승려에게 전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개암 죽염의 특징은 아무래도 서
해안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왕대나무를 재료로 하는 데 있다. 지금 개암저수지 아래에 위
치한 공장에서 전통비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죽염은 물론 치약, 비누, 화장품 등을 생산하
고 있다.

이 절에는 대웅전 말고도 보물 제1269호 영산회 괘불탱화를 소장하고 있다. 이 불화는 야
외에서 큰 법회나 제를 지낼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괘불(掛佛)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
모니와 제자들을 그린 불화이다. 18세기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이었던 의겸(義謙) 스
님이 1749년에 제작한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 큼직하게 석가모니불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및 2여래를 배치하였다. 인물들은 모두 둥근 얼굴에 다소 살찐 모습으
로 밝은 표정을 취하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와 천의의 화려한 문양장식은 의겸화사의 뛰
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산 정상에 있는 울금바위의 굴)


▲ 백제 부흥운동의 요람 울금산성

시간을 보니 2시. 3시까지 주어진 시간도 있고 점심을 먹은 뒤라 소화도 시킬 겸 아무래도
30분 걸린다는 울금바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앞장서 걸었다. 꼭 오름에 오르는 길처럼
운치 있는 길이다. 걸음에 자신이 있는 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따라온다. 소나무와 단
풍나무, 참나무와 서어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에다 촉촉이 배는 땀이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든
다.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과거에 이곳에 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원효대사가 수도했
다는 동굴에 이르렀다. 누가 기도를 했는지 촛불이 하나 외로이 켜있다. 벽에는 마애불을 새
기려 했다가 돌의 질이 좋지 않아 그냥 둔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조그만 웅덩이에 물이 있는데 과거 이곳에 사람들이 기거했을 때는 마실 수 있었던 것 같
으나 누가 그릇을 씻었는지 지저분하다. 이곳은 소정방이 김유신을 만난 곳이어서 우금암이
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이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하여 남쪽과 동쪽으로 모두 3km
남짓한 석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원래 변한 사람들이 쌓은 석성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중
심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성곽 안에는 백제 이궁의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시간 관계로 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올라온 분들은 약 20명, 얼른 기념 사진을 찍고 서서히 내려가도
록 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 올라온 길로 내
려간다.

의자왕 2년 백제는 신라의 서쪽 변두리 성을 마흔 개도 넘게 공략하여 국경선을 낙동강 기
슭에까지 밀어 붙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마침내 의자왕20년(660) 당나라 소
정방의 10만 군과 김유신의 5만 군은 사비성을 공략하였고, 이어 의자왕이 피난한 웅진성마
저 함락시켰다. 백제 유민들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투쟁을 벌였는데, 그 근거지
가 지금의 충남 예산의 임존성과 주류성이었다. 그렇게 벌였던 부흥의 투쟁은 나당연합군의
끈질긴 공략과 백강에 도착한 일본의 지원선단에 의해 663년 9월에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는 한중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돼 있으나, 지명을 서로 다르게 적고 있어 주류성
과 백강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울금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로 지정되어 있다.



(강증산 유적지 건물들)


▲ 지나는 길에 들른 강증산(姜甑山) 유적지

귀신사로 가는 도중 금평 저수지가 있고 바로 길옆 오른쪽에 강증산 유적지가 있어 잠시
들르기로 하였다. "부귀한 자는 빈천함을 알지 못하고 강한 자는 병약함을 알지 못하며 유
식한 자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빈천하고 병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겠노라, 그들이 곧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갑오 농민전쟁
이 실패한 사회적 혼란기에 민중들을 사로잡은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 영내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니 증산법종교 교당이 있고, 강증산 부부의 유해를 안치한 영대라는 건물이 왼쪽에
자리하였다. 조경이 잘 된 경내에는 넓은 주차장까지 갖추고, 태평전, 구릉사, 영대, 삼청전,
전하전, 경춘대, 대령전, 승묘전 등 웅장한 건물이 즐비하다. 이곳은 교세가 날로 확장되고
있는 증산법종교의 본부다.

건너편에는 강증산이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면서 도를 폈다는 구리골 약방이 있다. 구리
골 약방은 평범한 농가처럼 보이나 약방으로 쓰이던 방에는 증산이 쓰던 약장과 생활도구들
이 놓여 있고 작은 툇마루가 달려 있다. 증산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앞으
로 올 세상을 조화롭게 설계해놓는 천지공사를 한 뒤 1909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약방 앞의 기둥에는 그가 썼다는 부적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원래의 것이 너무 낡아서 유
리로 덮고 복사한 것을 달아 놓았다.

이곳 금평 저수지 주변은 인근 사람들에게 '오리알 터'로 불린다. '땅의 중심'으로서 모든
것이 여기로 모인다는 뜻으로 올래(來)터라 불리던 것이 오리알 터가 되었다고 한다. 증산
법종교는 증산의 딸인 강순임이 1937년에 창설했다. 그는 전주 노송동에서 '증산천사향원'이
란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벌이다가 1953년 오리알 터에 자리를 잡고 웅장한 대형 건물 여럿
을 지은 것이다.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는 증산이 49일 동안 기도한 끝에 도를 통했다는 곳
이다. "내가 곧 미륵이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로 오라."는 증
산의 유언에 따라 금산사 또한 증산교도들의 순례지가 된다.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증산은 1871년 음력 9월 19일,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客望里)에
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본명은 일순(一淳), 자(字)는 사옥(士玉)이며 증산(甑山)은 그
의 호다. 부친의 이름은 흥주(興周), 어머니의 성은 안동 권씨(權氏), 이름은 양덕(良德)이다.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道典)에는, 어머니 권씨 태몽에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으매, 온 세상이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13개월만에 그를 낳
았다. 출산 때 그의 아버지는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
을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
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 후에 나타난 사회적 참상과 혼란을 보고 인간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 종교나 인간의 능력으
로는 할 수 없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
다. 그래서, 그는 유불선 같은 기성 종교의 교리와 음양, 풍수, 복서, 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
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공부를 하고,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돌아 다녔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 사람인 김경흔(金京炘)으로부터 증산도의 중요
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충청도 연산에서는 당시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
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귀신사 경내에 위한 석수로 풍수지리에 의해 세움)


▲ 동음이의어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귀신사(歸信寺)

모악산(母岳山)은 전북 김제시와 완주군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93m이다. 전주시 남
서쪽 12㎞ 지점에 위치하며, 아래로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
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母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남평야의 젖줄
구실을 하는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와 불선제, 중인제, 갈마제 등의 물이 모두
이 곳 모악산으로부터 흘러든다. 정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내장산, 서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바라다 보인다. 예로부터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명당(名堂)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
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는데, 1971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처음 귀신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귀신(鬼神)'이라는 동음이의어가 언 듯 머리에 떠올
라 혼란스러웠으나 알고 보니, '귀신(歸信)'이라고 '귀의(歸依)'와 비슷한 아주 좋은 이름을
가진 절이다. 이 절은 모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
山寺)의 말사이다. 676년에 의상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다. 신라 말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원명(圓明)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임진
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10) 춘봉(春峯)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 등과 3층석탑, 부도, 석수 등이 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보물 제826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귀신사의 본당인데, 17세기경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
로 추정되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과 겹처마를 갖고 있는 단층
목조건물이다. 대적광전은 그 훨씬 후인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며, 고려시대의 일부 부재를
사용하였다. 구조는 내이출목, 외이출목으로 공간포는 1조식이며, 공포양식의 전, 후면이 서
로 다르다. 안에는 법(法), 보(報), 화(化)의 삼신불인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모
셨다. 모두 소조불로 1980년에 들어서 금물을 입혔다고 한다. 절 조금 위쪽으로 이상한 석수
(石獸)가 있어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절에 무슨 남근석을 모셨는가 하며 낄낄댄다. 풍수지
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므로 그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니까, 넌지시 알아들은 아줌마들
이 얼굴을 붉힌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방등계단 사리탑)


▲ 보물의 집산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작년에 막을 내린 KBS 대하사극 고려 태조 '왕건'에서 후백제 왕 견훤이 말년에 넷째 아
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
잡혀 유폐되었던 절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어딘가 익숙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인 599년
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지어졌다. 창건 당시에는 작은 절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진표(眞表)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곳에서 석달 동
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지금의 나주인 금성으로 도망한 뒤
왕건에게 투항하여 자신의 아들을 쳐줄 것을 청하는 아이러니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왕건
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만에 견훤은 번민과 울화로 등창이 심해져서
논산군 여산에 있는 황산사에서 여생을 마친다.

금산사는 신라 5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이 지역 불교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
였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미륵전, 대공전, 광교원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었다. 그것은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임진왜란 구국 3화상의 한 분인
뇌묵당 처영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금강문과
석물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것이 없었다. 1601년(선조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를 벌여
1635년(인조13)에 낙성을 보았고, 고종(高宗) 대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수문대사가 절을 복구할 때 지은 보물 제476호 대적광전은 1987년 12월에 일어난 화재로
아깝게 소실되었지만, 이르는 곳마다 보물이다. 미륵전(국보62), 대장전(보물 827), 5층석탑
(보물215), 6각다층석탑(보물27), 노주석(보물22), 석련대(보물23), 석종(보물26), 당간지주(보
물28),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24) 등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이제야 겨우 보물 서너 점을
갖게 된 제주도의 입장에서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국보 제 62호 미륵전(彌勒殿) 1,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겉모양이 3층으로 된
법당인데 내부는 한 층으로 통한다. 기단(基壇)으로는 양쪽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앉힌 돌계
단이 있는 특이한 구조다. 규모가 웅대하고 윗부분이 줄어든 비율이 크기 때문에 안정감을 준다.

보물 제22호인 노주석(露柱石)은 높이 2.3m의 석조물인데, 상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4각
형의 대좌처럼 조성되어 용도를 알 수 없다. 밑바닥에 하나의 돌로 된 지대석이 있고, 그 위
에 1단의 높은 각형 굄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보물 제827호 대장전(大藏殿)은 정면 3칸,
측면 4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인데, 금산사의 불상과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장경각(欌經
閣)으로 건립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635년(인조13)에 중건한 것으로, 다포계의 공포로 구성
되어 있다. 보물 제28호 당간지주는 지주 높이 3.55m로 기단석 1변의 길이 2.08m, 1.35m의
양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현재 당간을 받치고 있는 간대와 지주를 놓은 기단석
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경내를 시계 방향으로 돌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미륵전 북쪽으로 올라가니, 송대(松臺)라
불리는 높은 대가 있다. 절에서는 이를 방등계단이라고 부른다는데,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
단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제단으로서 율종사찰이
갖는 독특한 유물이다. 사방에 이를 호위하듯 서 있는 석상들 가운데는 돌하르방을 닮은
것도 있다. 가운데 모셔놓은 것은 보물 제26호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석종 모양의 화강암
부도였다. 눈이 얼얼할 정도로 보고 나오다가 아무래도 뭔가를 얻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 파는 곳에서 한국 불교 큰스님 10분의 선문답을 엮은 '큰바위 짊어지고 어디들
가시는가'를 사들고 경내를 벗어났는데, 벌써 도토리묵에 동동주를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아미타불!



(국보 제62호 미륵전의 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