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그윽한 예술의 향기를 따라 (1)

김창집 2003. 2. 25. 05:04
탐라문화보존회 호남서남부 답사기

(점심을 먹은 낭주회관 입구에 놓인 화분에 핀 매화)

▲ 봄과 함께 떠나는 여행

2003년 2월 21일 금요일. 그런 대로 맑은 하늘. 여행을 떠나는 설렘 때문에 잠을 조금 설
쳤으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 떠나는 41명 회원들의 마음도
그렇게 보인다. 우리가 타고 갈 제주발 군산행 여객기는 9시 20분에 출발하는데도 국내 면
세점 구경을 하겠다고 미리 들어간다. 출입문 앞 넓은 대기실 일부를 막아 외국인용 면세점
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양주류, 화장품류, 양담배, 가죽제품 등이 주 상품들이
고, 한 번 탈 때마다 한 사람이 35만원 어치를 구입할 수 있다.

소형 여객기가 다 차지 않은 걸 보니, 우리 일행이 주고객. 왼쪽 제일 뒷자리 창가에 자리
를 잡았다. 오늘 따라 하얀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이 너무도 선명하다. 이륙한 비행기는 비
양도 위에서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내 고향 곽지 해변과 협재 해변의 물빛이 모래에
내비치어 너무 맑고 곱다. 비취빛이라 할지 에머럴드빛이라 할지 그냥 환상적. 소관탈섬이
너무 작게 느껴지고, 오늘 보는 대관탈섬은 작은 섬을 몇 개 거느리고 있다. 추자도를 지나
면서부터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구름 위로 올라간다. 가도가도 뭉게구름이 눈부시다.

준비했던 책을 펴들었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야생초 편지'다. 이 책을 읽고 감동
을 받았는지 김재호 원장이 풀꽃을 좋아하는 나를 생각해서 어제 전화를 하더니만, 비행기
에서 읽히겠다며 가져 온 것이다. 내용은 들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림 묘사 솜씨가 보통
이 아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갇힌 세상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야생초를 기르며, 그것에
서 생명의 외경을 느끼고 사색하면서 인간의 삶을 반추해낸 독특한 책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우리가 들판에서나 길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도 대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저렇
게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지대석에 구름과 용의 모습이 조각된 발산리 석등)

▲ 발산초등학교의 석등과 5층 석탑

10:50. 군산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나가보니, 박영락 기사가 나와 있다. 재작년 여름 전라북
도 지역 답사 때 전주에 사는 정창현 선생님 소개로 만나 1년 전 지리산 답사까지 했으니,
세 번째 만나는 셈이어서 이제 반 이상이 구면이 되어 버렸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지만 몸
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며 미리 답사하고 식당과 잠자리를 예약해주기 때문에 단골이 된
것이다. 아는 것도 많고 성실해서 너무 편하다. 군산시 개정면에 있는 발산초등학교는 마침
방학이어서 차가 조금 들어갈 수 있었으나, 돌릴 곳이 없기 때문에 후진해서 나와야 했다.

학교 뒤 공간에 온갖 유물들을 모아 놓고 있다. 그것들은 일제 때 넓은 농장을 갖고 있던
미치야라는 일본인이 정원을 꾸미면서 인부들을 동원해서 여기저기서 수집해 놓은 것이다.
보물 제234호 발산리 석등은 익산군 삼기면에 있었던 것이고, 보물 제276호 오층석탑은 완
주군 고산면 풍림사지(風林寺址)에서 옮겨진 것이다. 이외에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석등, 부
도, 무덤 앞에 세우는 석물(石物) 등 닥치는 대로 모았다. 이런 것 하나만 보드라도 일제강
점기에 양식 없는 일본인들의 횡포와 수탈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제주
도 같은 곳에는 이런 보물이 단 두 개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은근히 부화가 치민다.

발산리 석등은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과 원형 하대석이 같은 돌이다. 특징은
기둥 모서리를 깎아 밑으로부터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기고,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은 4
각의 모서리를 깎아 4면에 사천왕이 새긴 특이한 작품이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화강암
석탑으로 높이 6.4m이며,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사각형 석탑인데 한 층은 없어지고 상륜부
를 새로 보완했다. 하대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어 있고 1층 갑석(甲石)은 4개의 판석
(板石)으로 처리되어 있다. 씁쓸한 마음으로 나오면서 화단을 보니, 예쁜 들꽃을 곳곳에 옮
겨다 놓고 이름과 특징을 적어 놓아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익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상주사 대웅전)

▲ 상주사(上柱寺)에서 본 늙은 배롱나무

시간 때문에 상주사를 빼도 좋겠다고 했으나 점심 시간 이전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고
해서 갔다. 군산시 서수면 취성산(鷲城山)에 있는 상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결국 금산사로 돌아
오게 되어 있어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을 돌 되는 셈이다. 특별한 보물은 없지만 근방에서
는 제법 역사가 오래고 운치 있는 절이다. 백제 무왕 7년인 606년에 신라의 승려 혜공(惠空)
이 창건하여 상주사(上住寺)라 하였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토였으므로 확실치는
않다.

공민왕 11년인 1362년에 혜근(惠勤)이 중창하며 지금 이름으로 바꿨으며, 고려말 공민왕이
이 절을 찾아 국가 안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그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는
특히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1834년(순조 34) 임피현 수령인 민치록(閔致祿)이 꿈을
꿨는데, 하얀 갓을 쓴 세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을 높은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꾸자 관리들에게 현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하였
다. 며칠 뒤 서포(西浦)에 십육나한을 실은 배가 닿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민치록은 그
십육나한을 높은 곳에 있는 이 절에 모셨고 이후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주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채 들이 있었다. 대웅전은 전라북도 유
형문화재 제37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
심으로 한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신중, 지장보살, 독성, 칠성, 산신 등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존불 위 닫집에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는데, 본래는 2기였으나 1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인이 몰래 가져갔다고 한다. 용마루 위에는 청기와가 2개 얹혀 있으며, 상단에는 일정한 간
격으로 11개의 용두가 놓여 있다. 그밖에 대웅전 안에는 1646년에 제작된 업경대 2기가 있
었으나 근래에 도난 당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것이라고는 한쪽에 여기저기서 모아 뭉
쳐놓은 이상한 석물(石物)과 배롱나무 뿐이다.



(동문안 당산의 짐대, 줄다리기 밧줄을 묶은 모습)

▲ 부안 동문안과 서문안 당산(堂山)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부안으로 가면서 인사 겸 여행 나온 소감을 말하도록 했다. 대구
참사 도중임에도 계획상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어 송구스럽다는 분들도 있고, 건강하고 집
안이 무고해서 답사를 오게 된 것만 해도 복을 받은 것이니, 열심히 보고 듣고 가야 하겠다
고 하는 분들도 있다. 사실 여행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많지만 모처럼 일상에서 빠져 나와
이런 기회에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고, 새로운 것을 많이 얻어 자신을 한껏 충전하고
가는 일도 중요한 것이다. 모처럼 한 마디씩 함으로써 동참감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여행
의 목표가 확고해지기도 해서 답사 때마다 행하는 일이다.

동문안 당산은 중요민속자료 제19호로 부안읍성의 동문밖(지금의 동중리)에 세워진 당산이
다. 주당산인 돌솟대와 보조하위신인 '상원주장군'이라 쓴 돌로 만든 할아버지 장승, '하원당
장군'이라고 쓴 할머니 장승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의 당산나무는 고사해버렸다고 한다.
이 장승과 솟대는 조선 숙종15년(1689)에 마을의 재앙을 막고 재복과 번영을 빌고자하여 세
웠던 것으로 옛 장승과 솟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농악과 함께 줄다리기를 한 후
당산에 줄을 감아 옷을 입히는 민속이 전해지고 있다. 할아버지 장승의 모습은 제주의 돌
하르방과 너무 흡사하다.

서문안 당산은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신간
석 2기, 석장생 2기를 모신 것이다. 옛날 부안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의 세 성문이 있었는
데, 그 중에서 서문밖(지금의 서외리)에 세워진 서문안 당산이 부안읍성의 세 당산의 중심당
산으로 성안 주민의 안녕과 질병을 막아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 이 당산은 조선 숙종
15년(1689)에 건립했다는 명문이 있는데, 연대로 보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받침돌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오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돌솟대 옆에는 할아버지 장
승 '상원주장군'과 할머니장승 '하원당장군'을 나란히 옮겨다 세워 놓았다.



(서문안 당산의 신간석,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

▲ 부안 구암리 고인돌군

12:30. 즐거운 점심 시간이다. 부안 낭주회관은 정식집이었는데, 8천원 짜리는 제법 고급스
러웠다. 사실 호남 지방에 와서 3천원 짜리 정식을 먹어도 반찬이 수없이 따라붙는데, 3배에
가까운 돈을 내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잘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시켜놓은 곳에
앉았다. 보통 한 상에 넷이서 먹게 되는데 여기는 다섯이서 앉도록 되어 있고, 상위에 음식
도 기대 이하여서 불평을 하려는데, 아들이 와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하
면서 자리를 옮기니, 안주감만 해도 푸짐하다. 자연산 굴과 삭히진 않았지만 홍어가 인기다.

부안 구암리 고인돌군은 사적 제103호로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 남방식 고인돌 13기가 모
여져 있었다. 변산반도에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많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고인돌들은 대부분 바다와 산이 접하는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어떤 곳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변산반도에 있는 고인돌의 중 대표격이 구암리
고인돌이다. 1956년 이홍직 박사에 의해 조사되어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인돌
들은 하서면 석상리 구암마을의 민가 울안에 있었으나 1996년 부안군이 이 민가를 매입하여
조그만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 구암리 고인돌들은 받침돌이 있는 이른바 남방식 고인돌로서 모두 자연암석을 덮개돌
로 하고, 몇 개의 굄돌을 괴었다. 이곳의 굄돌 중에는 비교적 키가 높은 굄돌도 혼용되고 있
으며, 4개의 굄돌로 받치는 것이 통례이지만, 여기에서는 대소 8개의 굄돌을 괸 예도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중에서 가장 큰 고인돌의 덮개들은 남북 장축의 길이가 6.35m, 동서의 최
대 길이 4.50m의 거북등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덮개돌 너비가 대단히 크다. 지난번에 들러
서 보았던 고창의 상갑리 고인돌들은 많기는 하지만 정제되지 못한 데 비해 이곳은 많지는
않지만 격식을 제대로 갖춘 것들이다.


(구암리 고인돌군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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