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 아슬아슬했던 지리산과의 첫 대면
지리산! 생각해보면 이 산은 지금까지 이상하게 나를 비껴갔다. 인연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근처에도 가 보질 못했다. 전문 산악인은 아니라도 설악산엔 정상에도 오르고 이름난 산은 어느 정도 스쳐 지났지만 지리산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긴 작년 여름 답사 때 남원에서 자게 되었던 것을 인터넷 접속으로 호텔을 잡았다가 피아골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긴 했지만. 그래서, 이번 지리산 자락 답사에는 상징적으로 노고단을 집어넣고 꼭 지리산과 대면을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안개 때문에 2시간 늦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못하게 되었으니.
그래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답사에 참가한 여러 사람들이 노고단을 오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기사와 시간을 논의하니 다행스럽게도 빠듯하지만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정했던 곡성 태안사(泰安寺)를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려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던 사찰이자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양 수도의 도량이다. 그 유명한 보물 273호 혜철 스님의 부도탑과 274호, 275호 광자대사의 부도당과 자경을 못 보고 말았다.
예부터 백두, 금강, 묘향과 더불어 한국의 4대 명산의 하나로 숭배되어 온 산이어서 그랬을까? 너무 쉽게 접근하려 해서 그런 시련을 줬나 보다. 경남 함양, 하동, 산청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 3도 5개 군에 걸쳐 광활한 산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1967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이름도 다양하다. 백두산의 맥이 흘러내렸다 해서 두류산이라고도 불렀고,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라고 하여 방장산이라고도 불렀다. 택리지에서는 지리산의 땅이 두툼하고 기름져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고 했다.
천황봉, 반야봉, 노고단 등의 3대 주봉과 피아골, 뱀사골, 화엄사계곡 등 10km 이상의 긴 계곡도 10여 개나 되며, 불일폭포, 구룡폭포, 칠선폭포, 가내소폭포 등 빼어난 경관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오지랖이 넓은 산이다. 지리산은 북동쪽으로는 남강,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계곡과 물이 절경을 이룬다. 또, 골짜기마다 웅대한 사찰들과 유서 깊은 암자들이 지리산의 정취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관광도로를 통하여 지리산의 주봉이자 유서 깊은 심장부 노고단에서 끝간 데 없는 산세를 드려다 본 후에 2박 3일 동안 그 자락을 더듬기로 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황봉에 천녀(天女)가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엄천사의 스님 법우화상이 그와 혼인해서 딸 여덟을 낳아 조선 팔도의 무당이 되어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구실을 맡았다고 한다. 그 천녀가 늙어 죽은 후에 천황봉 아래에 할미당을 세워 통일신라 때까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그 후 제사 터를 노고단(老姑壇, 늙은 할미 제사터)으로 옮겼고, 조선시대에는 구례군 광의면의 종석대 기슭으로, 조선 말엽에 이르러서는 화엄사의 스님들이 절 밖에 조그만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1962년부터는 구례군청에서 이 산신제의 이름을 약수제로 바꿔 군민행사로 이어가고 있다.
△ 아!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지리산 10경'은 제1경 노고단의 운해, 제2경 피아골의 단풍, 제3경 반야봉의 낙조, 제4경 섬진청류(섬진강의 맑고 푸른 물), 제5경 벽소령의 명월, 제6경 불일폭포, 제7경 세석평전의 철쭉, 제8경 연하선경(연하봉 일대의 경관), 제9경 천왕봉의 일출, 제10경 칠선계곡으로 흔히 일컫는다. 19번 국도에서 성삼재를 관통하는 861번 도로로 들어서는 순간, 벌써 지리산 자락의 서늘한 기운이 돌면서 도로변 풍광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국립공원 입구 사무소에 등록하여 입산료를 내고 나서, 이번에 빠듯한 일정 때문에 빼버린 '매천사당'과 '천은사' 입구를 넘어서자, 우리는 벌써 지리산 깊숙이 들어서 있었다.
천은사 입구에서 시암재를 지나 성삼재(1,090m), 심원, 달궁으로 이어지는 총36.7km의 지리산 관광도로는 비록 한라산 제2횡단도로인 1100m 도로보다 조금 낮은 편이지만, 산이 높고 험하기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아예 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멀미가 난다. 발 아래로 까마득히 펼쳐진 계곡 풍경과 눈 위로 나타나는 산세의 빼어난 모습을 보며 위험한 도로를 곡예 하듯 타고 달리며 지리산의 진면목을 느낀다. 간혹 멀미하는 사람이 있어 기사 아저씨가 높고 급한 커브를 돌 때마다 차를 밀어 올리는 소리 영차영차를 외치게 한다. 차창 너머로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오리나무 군락이 이어진다.
설악산을 넘는 한계령은 비교도 안 되는 높이와 경치에 취해 있다가 길 양쪽을 잇는 동물들의 통로인 터널을 지나자 곧 성삼재이다. 오후 5시가 넘어 있어 망서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같은 길을 오가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껏 가다가 7시 20분까지 돌아올 것을 지시하고 앞장서 걸었다. 응달진 곳이 대부분이어서 산길은 눈이 그대로 녹다가 얼어붙어 미끄러워 시간이 지연된다. 주변경관이나 나무는 한라산 고지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목이나 구상나무도 가끔 눈에 들어온다. 멀리 정상 부근에 이동전화 안테나인 듯 몇 개 서 있는 곳을 목표로 가속을 붙이기 시작한다.
노고단은 신라 때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이라 여겨 매년 봄, 가을에 제사 올리던 곳으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수련장이었다고 하며, 길상봉(吉祥峰)이라고도 불린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고 주변 경관이 빼어난 노고단은 지리산 등반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정상인 천왕봉까지 45km에 걸친 장대한 주능선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산행 코스이다. 보통 2박3일 내지 3박4일 정도의 일정이 걸리며, 능선 곳곳에 산장과 샘터가 있어 첫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부담이 덜하다.
원래 지리산 등반의 주능선 코스는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였지만 지리산 관광도로가 생겨난 뒤부터는 성삼재 휴게소에서 곧바로 노고단으로 오른 뒤 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천왕봉에 도착하면 대원사나 중산리 또는 맥무동 코스로 하산한다. 이렇게 우리같이 관광도로를 타고 와서 역시 조성된 산길을 따라 누구나 지리산을 쉽게 만나는 즐거움을 얻고 있지만, 그것이 생태계와 자연환경 파괴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편리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서서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지리산 자락으로 운해가 피어오르고 노고단이 저만치 앉아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아! 일몰이었다. 완전히 해가 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산봉우리 너머로 해가 빨려 들어간다. 장엄한 일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그런 대로 멋있는 광경을 보았으니 허위허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연이어 올라오는 사람들의 환성이 터진다. 몇 구비 더 오르니 일제강점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이었다고 생각되는 낡은 건물이 나타나고 이어 현대식 대피소와 관리사가 나타난다. 단숨에 뛰어오르면 바로 노고단 정상이다. 먼저 올라간 다섯 분의 "야호!" 소리가 들린다.
6시 30분. 인솔자로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오른 분들에게 빨리 내려오도록 소리를 지르고, 올라오는 분들은 설득하여 내려보냈다. 비교적 빨리 어둠이 내리는 산길, 게다가 여기저기 빙판 때문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쉽지만 돌려세울 수밖에. 나야 어느 때고 다시 올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노고단 오르는 즐거움을 남겨 놓는 거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았다. 뒤떨어지는 분들을 모두 데리고 와야 하기 때문에 제일 뒤에 서서 걷는다. 유일하게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아줌마가 연인처럼 소곤거리며 달빛이 비치는 눈길에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걷는데 편하라고 다 닳은 가죽 신발을 신고 온 아줌마가 남편과 제일 뒤에서 걷는다. 손수건을 꺼내 신발을 꽉 묶어 주고, 남편과 양쪽에서 손을 잡고 걷다가 셋이서 몇 번이나 나동그라졌다. 7시10분. 에정된 시간에 10분 앞당겨 큰 사고 없이 하산할 수 있었다.
▲ 지리산 온천에서의 해프닝
돌아오는 차안은 모두가 흐뭇한 얼굴이었다. 얼마를 걸었던지 모두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쐬며 지리산을 밟아 봤으니까. 그렇게 지리산은 좋은 산이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 일어난 거대한 산이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 고개(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는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다. 한 때 지리산에 350여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명산임을 증명해준다고나 할까.
그래서일까? 국가적인 대제사가 거행되던 노고단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 남악(南岳)으로 불리며 매년 봄, 가을이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장소였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모셨고,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 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일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가 되었던 지리산, 당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죄 없는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麻耶姑)는 남신 반야(般若)를 사모하여, 옷 한 벌을 고이 지어놓고 기다렸다. 달 밝은 어느 날, 마야고는 옷을 품에 안고 반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도 그리던 반야가 이쪽으로 손짓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야고는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 없이 그를 붙잡았는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반야는 보이지 않고 쇠별꽃들만이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실망하여 한없이 울던 마야고는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날려 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 위의 연못도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났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묵을 곳은 '지리산 온천 랜드'가 있는 '상하파크호텔'이었다. 우리 답사반은 비교적 나이가 든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많아 겨울에는 온천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숙소를 정할 때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도 온천 측의 선전대로 게르마늄이 함유되어 피부 노화 방지 및 갱년기 장애, 당뇨병, 협심증, 위장병, 암의 예방과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을 골랐는데, 오늘은 8시가 넘어버려서 내일 아침에 하기로 했다. 같은 비행기로 답사 나온 제주도 미술 선생님들과 소쇄원에서 한번 조우했는데, 숙소 식당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제자 2명이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하고 있어 소주를 한잔 나누었다.
아침 6시에 깨어 온천 랜드로 갔다. 2천여 평으로 3천 명이 동시에 입욕 가능하다는 말대로 원적외선, 맥반석, 한방 토암, 한방 이슬, 습식 등 5개 사우나와 원적외선 찜질방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노천온천에는 폭포도 만들고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어 오래된 부곡하와이보다 깨끗하게 느껴졌다. 100% 천연 온천수를 즐기다 심심해지자 평소의 버릇대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니다 실내 수영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침이라 물이 깨끗하여 혼자서 신나게 헤엄을 쳤다. 나오려는데 여탕, 남탕 표시가 있다. 그러면, 남녀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영장이 아닌가? 나는 그곳을 손으로 가리고 뛰어나왔다. 나중에 남 사장을 데리고 다시 2천원을 주고 수영복을 빌려 입고 들어 가보니, 여자들도 들어와 있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오면서 고로쇠물을 사 마셨다. 차게 해서인지 그런 대로 개운하다. 고로쇠나무는 무환자나무목 단풍나무과의 낙엽 교목으로 고로쇠·고로실나무·오각풍이라고도 한다. 산지 숲 속에서 자라며, 고로쇠라는 이름은 뼈에 이롭다는 뜻의 한자어 골리수(骨利樹)에서 유래하였다. 한방에서는 나무에 상처를 내어 흘러내린 즙을 풍당(楓糖)이라 하여 위장병·폐병·신경통·관절염 환자들에게 약수로 마시게 하는데, 즙에는 당류(糖類) 성분이 들어 있다. 한라산에도 제법 있는데, 추사의 기록에는 채취해 준 걸 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리산에서는 우수, 경칩을 전후하여 채취하는데, 가는 곳마다 팔고 있다. 1병에 5천원 하는 것을 몇 병 사서 한 컵씩 나누어 드렸다. <2002. 2. 22.>
<사진> 위는 '노고단 전경'이며, 아래는 지리산 사진 작가 하성목의 '노고단의 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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