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4. 3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우화 (1)

김창집 2002. 4. 10. 07:46


 

* 강요배 4. 3그림집 '동백꽃 지다' 중 하산민

 

 


<들어가면서>

잔인한 달 4월, 올해도 어김없이 대륙으로부터 황사가 날아와 섬 가득히 머물면서 시야를 가린다. 54년 전 이맘때 제주도에 불어 닥친 광풍(狂風)은 온 섬을 피로 물들이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1999년 12월16일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통과되었는데도 아직도 희생자 선정기준이 논란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어제는 모처럼 시간을 내어 '4. 3항쟁 다큐멘터리 전시회'에 다녀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4. 3행사를 모두 찾아다녔지만 금년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지 못하다가 어제 모처럼 시간을 내어 마지막 남은 전시회장을 찾은 것이다. 들어가는 순간 전시회장엔 아무도 없고, 물방울 듣는 소리만 스피커를 통하여 울려온다. 4. 3때 얼마나 지독하게 양민 학살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 드러나 있었다.

다랑쉬굴 속에 누워 있는 11구의 시체 중에는 51세의 여인과 9살 아이도 있었다. 이제 그 유골마저도 보이지 않은 손에 이끌려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지고 말았지만, 발굴 당시 처참했던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면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죄 없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4. 3의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소설은 작년에 펴낸 4. 3소설 선집 ‘깊은 적막의 끝’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원래는 특별법이 통과된 후 학생들에게 4. 3 교재로 쓰게 하고자 할 목적으로 써서 ‘제주작가’에 실었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4. 3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언하고자 연작 형태로 작업해왔다. 학생들에게 그 흐름을 이해시키는 데는 구체적인 나라나 기관, 또는 사람 이름을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일부러 우화 형태로 썼는데, 3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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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태어난 죄


--- ⑥ 우화(寓話)/ 김창집

 여기 한 섬이 있습니다. 넓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작은 섬입니다. 비록 기름지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살만한 섬입니다. 이 섬에는 정이 많은 토끼들이 서로 피를 나누어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며 살고 있었습니다. 간혹 뭍으로부터 욕심 세고 사나운 짐승이 들어 와서 못 살게 구는 일이 있었지만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 섬나라 이리떼가 들어와 못 살게 굴면서 오랫동안 온갖 노략질을 해갔습니다. 자신들이 바로 토끼 나라의 주인인 양 행세를 하면서 좋은 것을 다 빼앗고 진짜 주인인 토끼들을 종 부리듯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젊은 토끼들을 뽑아 자신들의 싸움터로 내몰았으며, 심지어는 예쁜 토끼까지 다 잡아갔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토끼들을 불러내 못살게 굴었습니다.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죽기도 하고 잡혀가서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기를 수십 년, 그 지긋지긋하던 생활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리떼들이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독수리를 비롯한 다른 나라 짐승들에게 호되게 당해서, 항복을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섬나라 토끼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섬 토끼들은 모두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토끼들은 이제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고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놓습니다.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지옥 생활이었어. 대놓고 자기 것을 빼앗아 가도 말 한마디 못했으니까…."
  "우리 집은 아버지를 먼 나라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다 돌아가시게 하고, 오빠를 싸움터로 내몰아 죽게 하고, 거기다가 곱디고운 동생까지 빼앗아 가서 돌려보내지 않으니, 집안이 완전히 쑥밭이 돼버렸어."

  "그 뿐이야? 그것도 모자라 이 토끼 섬에서 독수리단과 마지막 싸움을 벌이려고 큰 준비를 했었지. 우리 토끼들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한 거지."
  "그랬으면 우리 토끼 섬은 완전히 망가지고 우리 모두다 죽을 뻔했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이리떼의 싸움터에 불려 나갔던 토끼들이 돌아오고, 이런 저런 일로 이리 나라에 가 있던 토끼들도 모두 돌아 왔습니다. 토끼들은 새롭고 튼튼한 나라를 세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며 준비하는 한편 다시 찾은 자유를 누렸습니다. 지나간 36년 세월은 죽지 못해 살아온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그 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토끼도 많았고 잃어버린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한껏 자유를 누리며 토끼 자신들이 섬의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정리해 나가야 하는데, 독수리 나라에서 독수리들이 하나둘 날아와 자신들이 알아서 챙겨 주겠다고 하면서, 이리떼가 떠난 자리를 메우고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이리떼 밑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토끼들을 괴롭혔던 토끼들과 그들의 손발 노릇을 했던 검은 토끼들을 다시 그 자리에 앉히고 독수리들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 동안 이리와 친한 검은 토끼들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엄한 벌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텐데, 오히려 더 날뛰게 만든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소문들이 들리고 어수선한 가운데 한 해가 흘렀습니다. 뭍에서는 불곰 나라와 독수리 나라가 앞장서서 남쪽과 북쪽을 아주 나눠서 자신들이 필요한 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음모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시 한 해가 가고 다음 해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이리떼가 물러난 뒤 두 번째 맞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이리떼 밑에서 신음하던 토끼들이 우리 스스로 나라를 꾸려갈 테니, 이리 당신들은 물러가 달라고 떨쳐 일어섰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때는 그 일로 하여 많은 토끼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하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처럼 이리떼에게 놓여나서 이 날을 맞은 토끼들은 그 일을 기린다고 신이 나서 넓은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참에 자신들이 정말 이 섬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줄잡아 3만여 마리의 토끼들이 즐겁게 몰려들었습니다. 섬 중심마을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에 섬 곳곳의 토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따로 장소를 마련해서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3. 1 정신을 이어받아 다른 짐승들을 물리치고, 우리가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자!"
  "우리 토끼 나라를 둘로 가르지 말고 하나로 만들자!"
  "토끼 나라는 토끼들에게 맡겨라!"
  "우리 섬도 우리 섬 토끼들이 알아서 하게 놔둬라."

하고 외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한창 신이 나서 소리를 치고 힘을 얻은 토끼들은 모였던 곳을 떠나 거리로 나섰습니다. 막혀 있던 물꼬가 트이듯 억눌렸던 가슴을 열고 마음껏 소리쳤습니다. 이제는 숨통을 쥐던 이리떼들도 물러갔으니 새로운 토끼 세상을 열자고 신나게 외쳤습니다.

 여기서 놀란 것은 독수리였습니다. 약하고 순진한 토끼들이 이처럼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말을 탄 독수리와 그들을 도와 총을 든 검은 토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섬 토끼 떼들을 흩어놓으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검은 토끼가 탄 말에 어린 토끼가 채인 것입니다. 어린 토끼는 얼마나 아팠는지 쓰러지면서 "앙!"하고 큰 소리로 울어댔습니다. 이것을 본 토끼들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저런, 저런 나쁜 놈! 어린 토끼를 밟고 그냥 가다니. 저놈 잡아라!"
  "아니, 저런 몹쓸 짐승 같으니, 그 어린 것을…"
  "오늘이 어떤 날이라고, 검은 토끼 물러가라!"
모두들 자신의 일인 양 화를 내며 대들었습니다. 화가 난 나머지 돌멩이를 주어 도망가는 말 탄 검은 토끼를 향해 던지는 토끼도 있었습니다. 그 때입니다. 높은 곳에서 토끼들을 지켜보던 검은 토끼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습니다.
  "탕, 탕, 탕, 탕, 탕…"

 모여 있는 토끼들을 향해 마구 쏘아댔습니다. 미친 듯이 쏘아댔습니다. 총에 맞은 토끼들은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총 소리에 놀라 도망치던 토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총에 맞은 것은 대부분 구경하던 토끼들이었습니다. 여섯 마리가 죽고, 여섯 마리는 크게 다쳤습니다. 죽은 토끼 중에는 엄마 토끼와 등에 업혔던 석 달된 아기 토끼도 있었습니다. 힘도 없고 아무 죄도 없는 토끼들을 함부로 쏘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섬 토끼들은 모여 앞일을 걱정하였습니다. 맨손으로 총을 가진 독수리와 검은 토끼들을 상대할 수는 없고, 그냥 놔두면 앞으로 더 날뛰며 괴롭힐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아 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함부로 총을 쏜 검은 토끼들을 벌할 때까지 모두 '일손 놓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섬 토끼들은 너도나도 이 일에 참여했습니다. 3월 10일부터 시작된 이 '일손 놓기 운동'은 학교는 물론 기관, 회사, 심지어는 이 섬에서 나고 자란 검은 토끼들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뭍에 있는 독수리 본거지에서는 이 '일손 놓기 운동'을 자세히 조사했고, 독수리의 심복이었던 뭍에 사는 검은 토끼단의 우두머리가 와서 "이 섬의 토끼들은 모두가 빨간 물이 들었다."고 화를 내며 돌아가, 이들을 모두 잡아내야 한다면서 싸움 잘하는 뭍의 검은 토끼들을 뽑아 400여 마리나 섬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일손 놓기 운동'에 참가했던 섬에서 난 검은 토끼들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뭍으로 돌아간 검은 토끼단을 움직이는 우두머리는 한술 더 떠서 '섬 토끼들이 위협을 하니까 정당하게 총을 쏘았다.'고 해서 섬 토끼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항의로 죽은 토끼들을 돕기 위한 조의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뭍에서 내려온 검은 토끼들은 '일손 놓기 운동'에 참여했던 섬 토끼들 중 앞장섰던 토끼들을 마구 잡아 들였습니다. 그러자 섬 토끼들은 검은 토끼집 앞에 모여 억울하게 잡혀간 토끼들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검은 토끼들은 섬 토끼들을 더욱 열심히 잡아들였습니다. 검은 토끼들은 잡혀온 섬 토끼들을 때리고 겁을 준 뒤에 자기들이 꾸민 대로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할 수 없이 '일손 놓기 운동'을 끝냈고, 그 때부터 섬 토끼들의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책임을 느낀 토끼 섬의 우두머리는 독수리 단장에게 자리를 내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는 뭍에서 온 독수리 말을 잘 듣는 힘센 토끼가 차지하게 되었고, 나머지 다른 자리들도 차차 뭍에서 온 토끼들로 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들은 자기네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당한다 걸 보여주려고 섬 토끼들을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 위 소개 그림집 강요배의 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