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4. 3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우화(3)

김창집 2002. 4. 16. 07:43


 * 강요배의 4.3 화집 '동백꽃 지다'의 서천

 

 

“자, 흰소리 그만 하고 진짜 할 얘기로 들어갑시다. 당신은 독수리단의 지시를 받는 토끼 나라의 군인입니다. 나와 약속을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습니까?”
“토끼단 우두머리의 혼자 생각으로 이렇게 대화하러 나올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나는 독수리 단장이 시켜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독수리 단장 대신 일을 하는 것이고, 나의 얘기나 결정은 독수리 단장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면 대화가 되겠군요. 나도 이번 일을 일으켜 산에 오른 섬 토끼들의 대표로서 말씀하겠습니다. 이리떼에게서 풀려난 뒤 우리 토끼 나라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 나가야 하는데, 이리 밑에서 손발 노릇을 하던 검은 토끼들과 그들 밑에서 비위를 맞추며 시중을 들던 짐승들이 자기들의 지은 죄를 감추려고, 독수리 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 섬에서도 이리떼가 득실거리던 때보다도 몇 갑절 더 못살게 굴고 있으며, 특히 검은 토끼단은 아무 죄도 없는 섬 토끼들의 재산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 빼앗고 함부로 죽이는가 하면, 강제로 욕보이고, 심한 고문 끝에 죽음으로 몰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보십시오. 또 뭍으로 건너가 이리떼에 빌붙어 악질 개 노릇이나 동족을 팔아먹던 토끼들이 섬으로 내려와 검은 토끼들과 힘을 모아 섬 토끼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고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선량한 섬 토끼들은 견디다 못해 그들을 이 섬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이렇게 일어선 겁니다. 독수리단이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섬 안에 있는 이리떼 밑에서 그들의 손발이 되었던 검은 토끼와 동족을 팔아먹던 관리들을 몰아내고 섬 토끼들로 된 검은 토끼와 관리로 하여금, 섬 토끼를 위한 일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니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것입니다.”

“이리 나라에서 풀려난 지 3년이 되도록 독수리단 아래에서 노랑 토끼 노릇을 하고 있지만 색깔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우리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제일 급하니, 이제 무기를 버리고 내려가서 토끼 나라가 혼자서도 설 수 있도록 힘 합쳐 일합시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노랑 토끼단의 우두머리는 ‘싸우는 일을 당장 그만두고, 무기를 버린 다음, 이번 일을 하면서 죄를 지은 토끼들의 이름을 써서 내놓고 자수할 것’을 요구했고, 산에 오른 토끼단의 우두머리는 ‘나라를 둘로 나누려는 독수리단은 물러날 것, 나쁜 짓을 일삼는 검은 토끼들과 불곰들이 있는 곳에서 내려온 악질 동물들을 섬 밖으로 내보낼 것, 섬 토끼들로 검정 토끼단이 이루어질 때까지 노랑 토끼단이 맡아서 섬 토끼들을 보살필 것, 그리고 산으로 올라온 토끼들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양쪽에서 내세운 요구는 얘기를 하는 가운데 세 가지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첫째, 사흘 이내로 싸움을 끝내는데 어쩌다 조금의 싸움이 있는 것은 연락을 못 받아 그런 것으로 알겠지만, 닷새 뒤에 싸움을 걸면 그 때는 약속을 안 지킨 것으로 본다. 둘째, 무기를 버리는 일은 차례차례 해나가되 약속을 어기면 즉시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셋째, 무기를 버리고 산에서 잘 내려오면 산에 올라갔던 토끼의 우두머리들의 목숨을 지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은 섬에 총소리가 멈췄습니다. 오랜만에 섬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5월 1일. 이 일이 시작된 뒤부터 곱지 않은 눈으로 지켜보던 마을에서 독수리단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몰래 영화를 찍게 됩니다. 낮 12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젊은 토끼 30마리가 나타나 12채의 집에 불을 붙입니다. 그 불을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산의 토끼들이 내려와 그 젊은 토끼들을 쫓아내자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 토끼들이 얘기를 들은 검은 토끼들이 2대의 차에 나눠 타고 총을 쏘며 마을을 향해 들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2명의 마을 토끼가 죽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양쪽에서는 서로가 상대편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우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싸우지 말자고 한 약속은 자연히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특히, 독수리단에서는 이 사실을 놓고 산에 오른 토끼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우겨대며, 산에 오른 토끼들이 약속을 어겼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때 뭍의 북쪽에 와 있던 불곰 나라에서는 남쪽에 와 있는 독수리 나라에게 섬에서 일어난 일은 당신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욕을 해댔습니다. 이에 발끈한 독수리 나라에서는 ‘이번 일은 불곰들이 꾐에 빠진 붉은 토끼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서, 모조리 잡아 없애겠다고 날뛰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이틀 뒤인 5월 3일 낮.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에 있던 토끼 200여 마리가 짝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얼마 없어 독수리 3마리와 노랑 토끼 7마리가 그들을 데리고 마을을 향해 내려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토끼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댔습니다. 약속만을 믿고 내려오던 토끼들은 깜짝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몇 마리가 총에 맞아 죽었고, 나머지 토끼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배신감을 느낀 산의 토끼들은 분해서 다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5월 1일 마을에다 불을 지른 일을 산에 오른 토끼들이 한 일이라 덮어씌우며 욕하던 일과 이번에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가 봉변을 당한 걸 생각하면, 약속이 자기네를 꾀어내기 위한 흉계 같아서 더욱 괘씸했습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그 일을 산에 오른 토끼들이 저지른 일이라 우겨대는 데는 정말 믿지 못할 짐승들이란 생각까지 들어 끝까지 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내려가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일 바에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쪽을 택하리라 결심했습니다.

한편, 독수리단과 그 밑에서 일하는 토끼들도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검은 토끼단에서는 그 일이 산에 오른 토끼가 한 짓이라 우겼고, 노랑 토끼단에서는 검은 토끼단에서 꾸민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뭍으로부터 높은 짐승들이 내려와 이곳의 우두머리들과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도 이 의견은 팽팽히 맞서서 마침내는 싸움까지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뭍으로 돌아간 높은 짐승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노랑 토끼단 우두머리를 갈아 치웠습니다.

5월 10일은 온 토끼 나라가 대표를 뽑아 법을 만들고자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뭍에서는 처음부터 이 선거를 반대하는 토끼들이 많았습니다. 왜냐 하면, 나라가 둘로 나눠진 채로 한쪽만 선거를 치르게 되면 나중에 쉽게 합쳐지지 못하기 때문에 양쪽 같이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산에 오른 토끼들도 앞서 있었던 약속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고, 정말로 한쪽만 선거를 치르려는 독수리단의 흉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선거 반대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독수리단에서는 뭍으로부터 노랑 토끼들과 검정 토끼들을 엄청나게 불러들여 산에 오른 토끼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선거를 치르려 했습니다. 산에 오른 토끼단에서도 어떻게 하든지 이 선거를 막아 나라가 둘로 나눠지는 것을 막는 한편, 독수리단에서 꾸민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 일을 치르면서도 많은 토끼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들 사이에 낀 섬 토끼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여러 마을이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래서 섬을 셋으로 나눠 치른 선거에서 두 곳이 무효로 처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수리단에서는 산에 오른 토끼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 털이 박혔었는데, 선거 때문에 망신을 당한 뒤여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우선 큰 배를 불러다 섬 밖으로 못 나가도록 막아놓고 싸움 비행기도 불렀습니다. 투표하는 곳을 보호하는 일을 맡겼던 노랑 토끼단에게도 산에 오른 토끼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수리단에서는 강한 우두머리를 새로 데려다 놓고 싸움을 전부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검정 토끼단에서도 악독하기로 소문난 검정 토끼들을 뭍으로부터 뽑아다가 싸움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산 속을 뒤져 산에 올라 싸움하던 토끼를 마구 죽이거나 잡아들였고, 어떨 때는 그냥 일하러 다니거나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토끼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습니다. 검정 토끼들은 산에 올라간 토끼의 부모나 아내 토끼들을 불러다 함부로 굴며 대신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싸움 한 달 동안에 잡혀온 토끼의 숫자만도 6천 마리가 넘는 등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산 쪽에 있는 마을의 피해는 말도 못했습니다. 노랑 토끼가 훑고 간 다음 날에는 검은 토끼가 찾아 들어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젊은 토끼이 있으면 괜히 트집을 잡아 산에 오른 토끼들을 도와줬다고 하면서 끌고 갔습니다. 그러니 검정 토끼나 노랑 토끼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토끼들은 무서워서 피하려는 토끼만 보면 의심을 해서 붙잡아 다짜고짜 산에 오른 토끼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마구 때리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아이들을 높은 곳에 세워놓고 망을 보게 하다가 검정 토끼나 노랑 토끼가 오면 신호를 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다 산에 올라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했을 때는 산 쪽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다 늙은 토끼, 어린 토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쏘아 죽이고 집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산에 오른 토끼를 잡았다고 으스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섬은 온통 뭍에서 내려온 짐승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섬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다가 마음에 들지 않은 토끼가 있으면, 붙잡아 때리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였습니다. 마을에서 산에 올라간 토끼가 있다고 마을 토끼 모두 나오라고 해서 할아버지 토끼와 며느리 토끼를 시켜 별 해괴한 짓을 다 시키며 낄낄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성이 차지 않으면 모조리 끌어다 죽였습니다.

이렇게 새로 들어온 노랑 토끼단의 우두머리가 시키는 말을 잘 듣는 것을 본 독수리단 본부에서는 높은 독수리가 손수 섬에 내려와 계급을 올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독수리를 따르는 짐승들이 이를 위해 축하의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술자리를 흥겹게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노랑 토끼 우두머리는 잠자다가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 한 동안은 잠잠해졌습니다.

산에 오른 토끼들도 앞일을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마침 불곰단이 힘을 쓰고 있는 북쪽에서는 온 나라에 있는 자기네와 생각이 같은 토끼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한다고 대표를 보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산에 오른 토끼들은 거기 가면 혹시나 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대표를 뽑아 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독수리단에서는 불곰단이 시켜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트집을 잡고 더 많은 토끼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10월 19일에 섬으로 오려던 뭍의 노랑 토끼들이 못 가겠다고 하면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군함을 불러다 뱃길을 막아 고기잡이배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새로 온 노랑 토끼단의 우두머리는 바닷가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곳을 돌아다니는 토끼는 무조건 적으로 알고 총으로 쏘아 죽이겠다는 글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5km 넘는 곳에 살고 있는 토끼들은 모두 바닷가 마을로 이사하라는 소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어떤 곳은 이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노랑 토끼단이 마을을 덮쳐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산에 오른 토끼들이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훑어 내리는 작전은 10월 23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섬 토끼몰이 작전에 나선 토끼단은 산에 오른 토끼들의 숨을 곳이 되고 먹을 것을 준다면서 산 가까이에 있는 100여 개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아 있는 토끼들을 쏘아 죽였습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광(三光) 작전’은 한라산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오래 동안 살아왔던 산간 마을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아무 죄도 없는 바닷가 마을 토끼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산에 오른 토끼들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섬 토끼몰이 작전에 나선 토끼단은 빗질하듯 섬을 누비며 한 마리 한 마리 이 잡듯 잡고 나서야, 싸움을 위해 만들었던 노랑 토끼단을 풀어버리고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로 갈라졌던 남쪽과 북쪽이 서로 싸움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혹시 이 토끼들이?' 하고 앞서 있었던 일에 관련되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던 토끼들을 모조리 끌어다 무참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일로 하여 죄 없이 잡혀가 엉터리 재판으로 뭍의 감옥에 갇혀 있던 섬 토끼들을 모두 끌어내 그냥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뒤로도 그 때 죽어 간 토끼들의 자손들은 몇 십 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끼워주지 않아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이 섬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이 그렇게 당하고 억울하게 살아 온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일이 바로 밝혀지고 정당하게 대접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바람 하나를 가슴에 묻은 채 서럽게 살아왔습니다. <끝>




 * 2005년 4월 3일 북촌에서의 위령제, 가운데가 '순이삼촌'의 필자 현기영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