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해·소주·장가계 답사기(2005. 2. 25.∼3. 1.)
▲ 장가계로 가는 길
저녁 비행기를 타고 장가계(張家界)로 날아간다.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었다고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라는 말이 정말이라면, 굉장한 곳일 거라는 기대에 가슴이 콩콩 뛴다. 이번에 떠나오면서 미리 공부한답시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멋있는 풍경이 많았다.
음료수로 나온 칭따오(靑島) 맥주 하나 터트려 시원히
마시면서 자료를 뒤적인다. 장가계(張家界)는 중국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일의 국가 삼림공원 및 여행 특정지역으로 현재 계속해서 개발,
건설 중인 곳이다. 원래는 대융시에 포함됐었는데, 1994년 국무원에서 장가계시로 승격시켰다. 153만 명의 인구 중 69%가 20개의
소수민족으로 토가족이 93만 명, 백족이 10만 명, 묘족이 2만7천 명 순이다.
전체 면적은 9,583㎢로 전국토의 1천 분의 1에
해당한다. 장가계는 국내외에서 보기 드물게 수려한 봉우리와 동굴 외에도 인적이 드문 자연 지리 조건으로 원시상태에 가까운 아열대 경치와 생물생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약 3억 8천만년 전 이곳은 망망대해(茫茫大海)였으나,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해저가 육지로 솟아올라 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
등의 영향으로 오늘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자연 절경이 이루어졌다. 연평균 기온은 16°C이며, 강수량은 1200m∼1600mm
정도이다.
장가계가 널리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인데, 1982년 9월
25일에 국가로부터 "장가계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는 국무원에서 무릉원을 "국가 중점 풍경 명승구"로 승격시켰다가,
1992년에 무릉원이 세계자연유산에 포함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지 시간으로 9시, 저녁 늦게 도착한 우리는 식사 후에 민남호텔에
짐을 풀었다.
▲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
이튿날인 2월 27일은 날씨가 좋지 않아 일정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먼저 보봉호(寶峰湖)를 보기로 하고 출발해 차안에서 안내인의 얘기를 듣는다. 장가계라는 이름은 토사구팽이란 고사성어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을 보면, 한나라 유방(劉邦)과 초나라 항우(項羽)와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하는 데 큰공을 세운 사람이 한신(韓信)이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했으나,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마침 항우의 장수였던 종리매(鐘離昧)가 옛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일찍이 전투에서 종리매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유방은 그가
초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은 차마 옛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안 유방은 진평(陳平)에게 상의하여 운몽(雲夢)에 행차한 뒤 제후들을 초나라 서쪽 경계인 진나라에 모이게 했다. 한신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진해서 배알하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에 술수가 남다른 가신이 한신에게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배알하시면 천자도 기뻐하시리다."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말을 종리매에게 했다. 그러자 종리매는 "유방이 초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정말 잘못 보았네. 자네는 남의 장(長)이 될 그릇은 아니군. 좋아, 내가 죽어주지." 하고는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가서 유방에게
바치지만,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게 했다. 그래서 화가 난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나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
당함이로다(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했는데, 줄여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한다.
▲ 장량(張良)과 장가계
한 고조 유방(劉邦)이 초나라를 칠 때, 그에게는 한신(韓信) 장군 외에 책사 장량(張良)이 있었다. 책사 장량은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숨겨진 것까지 놓치지 않고 보았던 혜안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아래로 땅의 기운을 살펴서 그 진상을 살펴보았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와 운수, 나아가서 인간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렸으며, 멀리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천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았다 한다.
결국 유방이 얻으려고 했던 왕도(王道)는 장량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량은 유방에게 그 어렵고 소중한 천명의 길을 열어주었던 사람이다. 유방은 장량으로부터 얻은 천명(天命)이라는 무기로
'천하(天下)'를 얻었고, 그 때 부렸던 사냥개의 하나가 책사 장량이라 할 수 있다. 장량이 유방의 오른팔이라면 한신은 그의 왼팔 격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방은 한신이 언젠가는 자기를 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종리매를 숨긴 것을 구실로 그를 제거하여 불씨를 없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사냥개 장량은 끓는 솥을 피하고 천수(天壽)를
누렸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교훈을 뼛속 깊이 느낀 장량은 조용히 가족을 거느리고 아무도 모르는 이곳 경치 좋고 조용한 장가계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백년이 흐르는 동안 이곳에는 장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실제로 장가계 국가 삼림공원 내에는 장량의 무덤이 존재한다. 무릉원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1,334m이고, 풍경구의 면적은 264km에
이른다. 우리가 흔히 장가계라고 하는 곳은 장가계시의 국가 삼림공원과 츠리현의 삭계속 풍경구, 쌍즈현의 천자산 풍경구 등 크게 세 개의 풍경구로
이루어졌다.
▲ 산 속의 인공 호수 보봉호(寶峰湖)
차에서 내리자 가게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비옷과 우산을 들고 "천 원!"을 외친다. 마침 우산을 준비 못한 터라 아저씨가 쓰고 있는 우산을 받아 천 원을 주고 샀는데, 남 사장이 두 개에 천 원 주고 샀노라고 비닐 비옷을 준다. 비가 심하게 오지 않기에 우의는 넣어두고 우산만 쓰고 올라가는데, 가마꾼이 호객 행위를 한다. 나이가 많거나 걷는 게 시원치 않은 사람을 찾아 2만원을 외치고 있다.
입구에는 보봉호의 물을 끌어내려 커다란 폭포를 만들어 놓았다. 한 25분 걸었을까? 몇 개의 좁은 계단을 오르니, 앞에 호수가 펼쳐진다. 앞에 와 있던 팀이 유람선을 타고 있다. 이 보봉호는 댐을 쌓아 물을 가두어 만든 인공호수이다. 길이는 약 2.5㎞이며, 가장 깊은 곳 수심이 72m이다. 높은 산 속 기이한 바위로 둘러싸인 호수가 되다보니, 물이 맑기가 수정 같다.
배에 올라탄 일행은 아름다운 호수의
정취에 취해 바뀌는 풍경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현지 안내인의 토가족(土家族) 이야기를 들으며 가는데, 매어놓은 빨간 기둥의 배가 나타나 그
속에서 토가족 아가씨가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사라진다. 아쉬워서 같이 탄 현지인 카메라 아가씨에게 노래 한 곡을 더 청해 들었는데, 이어 호수
끝에서 한바퀴 돌아 내릴 때까지 노래 잔치가 벌어졌다.
안개가 아니라면 더 선명한 사진을 찍을 텐데 하고 아쉬워
해보지만 한편으로 구름과 안개가 더 정취를 자아낸다. 올라가 기념 촬영을 하고 아쉬운 선경(仙境)과도 이별이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인데
빙빙 돌며 내려가게 돼 있다. 내려가 가판대에서 배터리와 CD, 그리고 간단한 사진첩을 샀다. 모든 것이 천 원 단위다. 물건이 좋든 말든
여기서의 천 원은 참 요긴하다고 웃는다.
△ 봉우리마다 눈, 황석채
다음 우리가 찾은 곳은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황석채(黃石寨)다. 우리를 인솔했던 세아여행사 사장님이 우리들에게 등산화를 준비하고 아이젠도 있으면 갖고 오라고 했던 대로 이곳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신발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들어 파는 짚신을 사서 덧신처럼 신었다. 우리는 먼저 삭도(索道, 케이블카를 말함)를 타고 육기각(六奇閣)과 일부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서 주위를 구경했다.
안개 틈으로 돌기둥과 돌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 나무와 주변
경관을 바라보며 황석채에 올랐다. 황석채는 장가계 공원에서 제일 큰 관람대인데, 해발 1,300m로 주변의 경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하나 구름에 가려 먼 곳을 못 보는 것이 아쉽다. 장가계를 일으킨 장량이 이곳에서 도를 닦다가 조난을 당했는데, 그 스승인 황석공(黃石公)이
그를 구원한 다음부터 이곳을 황석(黃石)으로 불렀다 한다.
옛날엔 세상과 난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이곳에 은거하여
살았다 한다. 명나라 말기에 한 출가인이 산정에 청평사(淸平寺)를 지었다.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서서 산적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관청에서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수차 공격했으나 깨뜨리지 못하면서 황석채는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황석채는 걸어서 올랐다가 한바퀴 돌고 내려가는
코스도 있고, 삭도를 타고 오르내리는 코스도 있다.
곧바로 서 있는 수백 길의 바위 기둥 위에 아찔하게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여럿 있고 제일 높은 곳에 세워놓은 육기각(六奇閣) 3층으로 오르다 막아 놓는 바람에 그곳에서 사방을 조망하진 못했지만
이곳저곳 바위 끝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를 돌며 구경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삭도를 타고 내려오며 다시 주변의 경치를 조망해 본다. 우러러보고
옆에서 보고 올라가 내려다보고 나니, 그 웅장함이 반감되는 느낌이다. (계속)
♬ 淚的小雨 - 등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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