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가는 길. 세상의 번거로움을 모두 버리고 훌훌 털며 떠나는 여행이 아닐지라도 무조건 좋았다. 제주시 박물관대학 16기생과의 첫 만남, 서부지역 고려유적 첫 답사지는 영실 입구에 있는 존자암(尊者庵). 1호차와 2호차 번갈아 가면서 이곳에 대해 대충 설명을 해둔 터라, 같이 분위기를 느끼며 산길로 들어섰다. 가을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바람이 온몸을 엄습하고, 가끔 먼저 붉은 단풍이 한두 가지 비치기도 한다.
‘살아온 날들의 허리를 잘라/ 이름 없는 별로 띄워 놓고/ 당신 앞에 서면/ 이렇듯 청청해지는/ 사바의 세계// 각기 다른 소망 달고/ 흔들리는 연등 사이로/ 풍경 건드려 고요를 깨는/ 당신의 뜨거운 손/ 스스로 비운 적도 있습니다// 햇살 사위어/ 적막처럼 가라앉는 어둠 속에서/ 영겁의 꽃씨/ 저마다의 가슴 텃밭에 심으니// 이 땅에 오신/ 당신의 뜻 결코 헛되지 않아/ 헤매는 길손의 구원이더이다/ 우리 가는 이 길에/ 당신은’ --- 하두자 ‘산사(山寺)’ 전문
서귀포시 하원동 볼래오름 기슭에 있는 옛 사찰 존자암(尊者庵)의 자리인 ‘존자암지’는 1995년 7월 13일 제주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20,800㎡에 달하는 나한도량으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등 옛 문헌에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특히 ‘대장경’과 ‘고려대장경’의 ‘법주기’에 “석가모니 제자 열여섯 존자 중 여섯 번째 발타라존자가 탐몰라주에서 불도를 전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
1993년에서 1994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건물지 북쪽에 있는 부도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던 것으로, ‘탐라지’에는 “본래의 존자암지는 영실에 있었다.”고 전한다. 1998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11월까지 22억3천820만원을 들여 대웅전, 국성제각(國成祭閣), 요사채 등을 복원하고 7억5천만 원을 들여 진입로 공사를 완료했다.
길이 닦이기 전, 탐문회원들을 대동하고 첫 답사를 오던 날 미끄러지며 올랐다가 내려와 보니, 등산화와 바지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잘 만들어진 오솔길을 가며, 노랗게 물든 서어나무 잎과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덜꿩나무나 낙엽에 반쯤 묻힌 천남성 열매가 하나씩 물들기 시작하는 모습도 오늘은 감동이다. 운동 삼아 걷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지 마는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뒤에서 즐거운 추억을 나누며 따라 온다.
어느덧 나무 사이로 오래 전에 올랐던 볼래오름 능선이 다가오고, 그 때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라돌쩌귀 꽃의 무리들. 용담 꽃도 곳곳에서 나타났지. 이 오름 이름이 근원이 되었다는 ‘볼래’라고 부르는 보리수나무 열매도 곳곳에 박혀 있었고, 정상에 늘어선 참빗살나무도 그 잘 익은 열매를 터트려 빨간 속살을 드러내곤 했지. 오르는 길에서 만났던 으름, 머루, 다래, 정금, 주목 열매까지가 주전부리가 되고.
생각하는 사이 번듯하게 복원된 건물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절 입구 한 단풍나무 가지가 하나둘 붉었고, 동쪽 종각(鐘閣) 앞의 나무는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했다. 단을 하나 올라 왼쪽에 이곳 유물을 발굴하면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기와 편으로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옆에서 합장한 분들이 보인다. 빨리 오신 분들 중에는 벌써 대웅전으로 가서 절하는 모습이 잡힌다.
복원된 사찰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해 국성재각, 스님이 기거했던 요사채 등이다. 대웅전은 연면적 95㎡규모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지어졌으며, 국성재각은 연면적 26㎡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존자암지를 발굴한 결과 크게 4단의 석축대지로 이루어진 공간 안에 다소 시기를 달리하는 시설물이 밀집되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가장 오래된 유물로 명와(銘瓦)가 있는데 이 기와는 고려말(1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존자암의 창건 연대를 살펴볼 만한 기록으로는 홍유손(洪裕孫)의 소총유고(筱叢遺稿)에 “존자암은 高(고) 梁(양) 夫(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났을 때 비로소 세워졌다.”(1498)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존자암은 3성이 처음 일어난 때 만들어져서 3읍이 정립된 후까지 오래 전하여 왔다.” “4월에 점을 쳐서 좋은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이를 국성재(國聖齋)라 한다. 지금은 그것을 폐한지 겨우 8년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을 찍느라 뒤쳐졌던 나는 바로 부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옛것 그대로인 것은 부도탑 뿐이다. 세존사리탑으로 전해지는 이 부도 모양의 탑은 제주현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지대를 단단히 다진 후 8각 기단을 구축하여 그 위에 괴임돌을 놓고 탑신을 얹어 옥개석을 동일석으로 만들었다. 탑신석은 석종형(石鐘形)에 속하나 장구형(長球形)으로 상하를 평평하게 치석하였으며, 중앙부로부터 상하단에 이르면서 유려한 곡선미를 보이는데, 제주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7호로 되어 있다.
조선조말의 역사, 민속학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법주기’의 근거를 토대로 제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았으며, 향토사학자 김봉옥(金奉玉) 선생도 홍유손(洪裕孫)의 ‘소총유고(篠叢遺稿)’의 기록을 근거로 이 같은 주장을 하였다. 2001년 12월에 한라일보 탐사 팀이 영실에서 20명 규모의 수행굴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이곳이 옛 존자암 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도탑 앞에는 한중일 동양3국 중 제일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곳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허허!
돌아서서 내려오는 내 눈에 파란 가을 하늘이 한 자락 펼쳐진다.
‘너를 만나려면/ 쑥밭재 잿마루로 가야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에 묻히는 삶은/ 신촌, 시청앞, 종로에서 다시 부활하여도/ 이제는, 너를 만날 수 없어/ 아득한 쑥밭재 잿마루로 가야한다// 조개골 거슬러,/ 시간이 멈추어 서는 상수리 숲 언저리 어디쯤/ 거기 해 뜨고 해 지는 종일/ 작은 용담꽃 되어 너를 바라보다가/ 날 저물어, 꼭꼭 품어 두었던 별들이/ 사랑한다는 말처럼 떠오를 때/ 내 푸른 꽃잎에도/ 눈물 같은 이슬은 맺혀// 직박구리 둥지 떠나고/ 다들 바삐 떠나가면, 끝내 나도/ 마른 꽃대궁 남겨두고 떠나겠지만/ 내 푸르름 다 할 때 까지/ 너만을, 너만을 바라보리라’ --- 권경엽 ‘가을 하늘 2’ 전문
♬ 피아노로 만나는 가을 연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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