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달아주는
카네이션을 가슴에 꽂은 채, 자신의 길을 되돌아보며 반성도 해보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바른 심성으로 키울 수 있을까도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여기 몇 년 전에 ‘교육제주’ 가을호에 실었던 졸작(拙作) <전정>을
실었습니다.
* 사진은 스승의 날에 핀 겹벚꽃
[단편] 전정(剪定)
시내 사립 ㅎ실업고 학생주임 고광석 선생이 여름방학 합동
생활지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 선 것은 밤 12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열대야(熱帶夜) 현상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지 마루에
차례로 누워 있던 아들 3형제가 움찔거리며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기척을 한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돌아온 대학 2학년인
큰놈과 입시 준비에 좁은 집에서 한껏 짜증이 나 있을 고3짜리 셋놈, 그리고 고1인 작은놈. 그 동안 많이도 자랐다. 학교 일에 바빠 제대로
들여다 보지도 못했는데, 아무 탈 없이 고맙게 잘들 자라 주었다. 올 여름에는 어떤 일이 있드라도 에어컨 한 대는 들여 놓아야 된다고 응석
부리던 작은놈은 아무것도 안 덮고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채다. 이놈도 이제는 몸집이 지 아버지를 넘어서겠다고 눈가늠하며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섰다.
‘훅-’ 하고 선풍기의 뜨거운 바람이 일시에 공격을 한다. 물 몇 바가지 뒤집어 쓸 양으로 바지를 벗어 걸고
한쪽 양말을 막 벗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그의 아내가 깨어나며,
“많이 늦었수다예. 당신, 대구(大邱)에 아는 친구 있수가?
10시부터 친구라면서 전화가 몇 번 있었수다. 설명하기 힘들다고 그냥 끊어버립디다.”
“누구지? 대구라고? 아는 사람이
없는데.”
“꼭 전화할 일이 있다고, 늦게라도 전화 할 테니, 기다리라고…. 한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 합동 생활지도가 좀 오래 걸렸어. 더워 놓으니까 해수욕장이란 해수욕장, 해변이란 해변, 공원이란 공원,
모두들 벌겋게 드러낸 채 제 정신들이 아니었어. 어느 놈들을 먼저 지도해야 할지, 누구에게 먼저 어떤 지도를 해야 할지, 이건 온통
뒤범벅이야.”
“많이 집으로 돌려 보냅디가?”
“많이 보내긴 어떻게 보내. 오히려 당신들이 뭐냐고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따지던 걸. 하긴 학교 안에서도 직접 수업 안 들어가시는 선생님에게는 모른 척 인사도 않고, 지도해도 말을
잘 안 듣는데…. 고작 해야 아직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남녀가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기껏 빨리 집에 돌아가라는 말에는 ‘아저씬
머우깡(아저씨는 뭡니까)’ 하면서 잡아먹을 듯이 대들고.”
“하여간 큰일이우다. 그나저나 당신 그 학생과(學生課) 그만
두게 되지 않았수가. 학생과장만도 4년째 아니우까. 어떵허연(어째서) 그 학교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당신만 줄기차게 학생과
시켬수가.”
“아무가 맡아서 하든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도 정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한심스럽다. 한 곳에서 20여년을 사회과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과를 벗어나 본 기억이 없다. 젊었을 때는 젊었다는 이유로, 나이
먹으면서는 노련하다는 이유로 생활계를 넘나들다가 학생자치계를 몇 년 담당하고는 학생주임이 되고서 부인의 말대로 4년째를 맞은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고 선생 자신의 책임도 컸다. 교직에 처음 발을 디디면서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학생들과 뛰며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게 지냈다. 교사란 모름지기 학생들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고, 공부 잘하는 인문계 학생 10명을
좋은 대학으로 진학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뚤어진 실업계 학생 1명을 제대로 사람 만들어 내 보내야 사회가 밝아지고 국가 발전의 암적 존재가
사라진다는 나름대로의 교육철학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맡기 꺼려하는 자리를, 쉽게 맡길 수 있고 즐겁게 일하려는 고
선생에게 생활계의 한 자리를 고정적으로 배려(?)하였고, 본인으로서도 차차 부담을 느끼긴 하지만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으로 학생과를 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샤워장에서 물을 몇 바가지 뒤집어쓰고 나오는데, 마침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다. 언듯 시계를 보니, 어언 2시에 다가서 있었다. 송수기를 들자마자 대뜸 경상도 방언이 튀어 나온다.
“니
광서기가? 니 나 혹시 기억 안나나. 중학교 2학년 때 같이 앉았던 정환이 모르것나 박정화이.”
“아, 박정환? 너
오랫만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화 번호를 알았지? 정말 반갑다야.”
“말또 마라. 여기서도 안테나만 세우문 제주 소식 빠삭하다.
너거 고등학교 선생하면서 니 악명 높은 거 다 알고 있다. 짜슥하고는, 최성식 선생님의 참된 제자락카믄 너 어찌 그럭케
쓰겄냐?”
“자식, 너 말투 들어 보니까 대구 촌놈 다 됐구나. 35년만에 전화하는 놈이 신소리 그만 둬라. 급한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어서 사연이나 들어 보자.”
“신소리라? 신소리락 했나? 너거 학생과 있으면서 죄 많이 지었더라. 나안테
맞아도 한참 맞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최선생님이 운명하셨닥카면서? 밤늦은데 더 얘기하기 싫다. 내, 집도 모르고 길도 모른다. 오늘 아침
아홉시 비행기로 가는데 니 공항에 마중 나오거라이. 끊는다.”
‘아니 최선생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고선생은 믿기지
않았다. 며칠 전 고향 바다에 들렀을 때도 꼿꼿한 모습으로 혼자 바닷물에 들어서서 쓰레기를 건져 올리고 있지 않았던가. 고 선생은 가슴 속에
어떤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슬며시 자리를 빠져 나와 아이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마루를 돌아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켰다. 부엌쪽을 향해 누워 있던 큰놈이 눈이 시린지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다. 모서리 싱크대장 문을 열고 손을 내미니 됫병 소주가 잡힌다.
지난 4월 부친 제사에 제주(祭酒)로 사용했던 것인데 큰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여니 마땅한 것이 없다. 겨우 김치꽁댕이 그릇을
찾아 들고 큰 글라스에 천천히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최 선생과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했다.
면 소재지에 있는 시골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시업식에 새로 오신 선생님을 소개하는데, 짝달막한 키에 검정 물들인 군작업복을 입으시고 동네 아저씨 같은 웃음을 흘리며
조회대에 올라, 자신도 이 고장 출신인데 앞으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같이 공부해 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일제(日帝) 잔재의 권위주의적인 군대식 교육에 익숙한 터라, 웃으면서 더구나 선생님이 같이 공부하겠다는 뜻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드디어 반 편성이 끝나고 담임을 발표했는데, 바로 이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
그 중학교에는 1개 학년에 남자 2학급, 여자 1학급으로 A반은 여학생반, B, C반은 남학생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B반 담임을 맡은 최
선생은 자신도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렵게 소학교를 다니는 동안 일본인들의 행패를 견딜 수 없어,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교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객지로 떠나, 혼자 고학을 하며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보니까 6.25가 터져,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제대 후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하면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좋은 반을 만들어 보자.’는 말을
먼저 했었다.
그 때부터 2학년 B반은 특수한 반이 되었다. 최 선생은 월급을 쪼개 학교 교사 뒤쪽 200여 평이 되는
텃밭을 세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한 선생님께서는 철 따라 시금치며 마늘이며, 배추, 무 등을 이곳에 파종하여, 점심시간이나 빈 시간 또는
방과후를 이용하여 틈나는 대로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김을 매고, 학교에서 나오는 변을 썩혀 거름을 만들어 뿌렸다. 채소는 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주었다. 3일과 8일, 이곳 면 소재지의 5일 장날이 되면 몇 사람을 지목하여 아침 일찍 등교하게 하여 서둘러 채소를 캐고는 장으로
운반시켰다. 장터에는 선생님 사모님께서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이 수수한 장사꾼 차림으로 웃으시며 그것을 받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마다 않고 파셨다.
아다시피 당시 이 땅 제주도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인들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공출당하고, 해방 이듬해 여름 콜레라의 병마에 시달린데다가 잇달은 가뭄과 흉년을 견디니, 그 지긋지긋했던 무자년 난리가
일어났고, 이어 6.25 피난민이 들이 닥치고…. 그 와중에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사는 아이들도 있었고, 편모슬하에 어렵게 사는 것은 좀
나은 편이고, 친인척집에 빌붙어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누가 크게 신경 써주지 않으면
중학교에서 견뎌내기 힘들 때였다.
이런 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학생 하나하나의 집안 사정을 파악하기에
힘써 어쩌다 반 학생이 결석이라도 했다 하면 5~6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방문하여 꼭 학교에 나오도록 하였다. 가정 형편상 수업료를 낼 수
없는 학생들에게는 장날 채소 판 돈을 저축했다가 닭을 몇 마리 사 주어 키우게 했다.
지금도 최 선생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은 농번기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반 친구네 집에 일하러 갔던 기억이다. 집에 농사를 안 짓거나 바쁘지 않은 사람은 일요일 지정한 곳으로
나오도록 해서 일처리 못해서 애를 태우는 급우네 밭에서 하루 종일 김을 매거나 보리를 베는 일 등을 하였다. 그럴 때면, 선생님께서는 책 읽은
이야기며 위인들의 이야기, 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일이 하나도 고되지 않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집이 바빠 부모님들이 일요일만 기다리는 집 아이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핑계를 대어 같이 어울리기도
하였다.
선생님이 즐겨 해준 이야기 중에는 페스탈로치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점점 ‘한국의
페스탈로치’라는 별명으로 통하게 되었다. 고 선생이 오늘날 교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나, 지금과 같은 교육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것도 이 때
최 선생의 영향이라고 본인은 믿고 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달이 환히 비친 길을 둘이서만 걷게 되었는데, 최 선생이 입을
열었다.
“광석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기 힘들지.”
“아, 아닙니다. 다른 친구에 비하면 좋은
편입니다.”
“나도 다 알고 있어. 식구들이 많은데다가 번듯한 밭 한 뙈기 없으니, 곤란할 수밖에. 아버지는 불행하게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만 받고 사셨지만 너희 세대에는 그래선 안돼. 바로 네가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서 집안을 일으켜야 된단 말이야. 굳은
뜻을 갖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못 이룰 일도 없어. 다 찾으면 길이 있게 마련이야. 참, 너 광석이. 네 장래에 대해 생각해
봤어?”
“아뇨. 아직….”
“돈을 많이 벌어 산업을 일으킨다든지 정치가가 되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 중의 하나는 나 같은 교사의 길을 가는 일이야. 지금 우리 나라는 개화기를 맞아 봉건주의
체제를 막 벗어나면서부터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나서 엉망진창이 되었어. 그 상흔을 딛고 사람들을 달래여 살 만한 나라로
회복시키는 길은 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 광석이. 잘 알아들어?”
그 날 이후 고 선생은 가슴 속에 큰 뜻을 키워 갔다.
누가 뭐래든 어떤 역경에 부딪치든 그가 품고 있는 남모르는 희망에 가슴이 터질 듯하였다. 중학교를 마치자 그는 제주시로 나왔다. 사범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회사 사환으로 취직해서 야간 고등학교로 군대로 다시 돈을 벌어 지방대학 법과를 나와 고등학교
강단에 서기까지 꼬박 12년이 걸렸다. 그 동안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버팀목이 되 주었던 것은 그의 스승 최 선생의
영향이었다.
제주국제공항은 벌써 관광객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고 선생은 한잠도 못잔 얼굴로 국내선이 도착하는 문 앞
의자에 앉아 35년 전에 헤어졌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려 무던 애를 쓰고 있었다. 이 친구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된 것은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당시 밥은 친척집에서 얻어먹고 있었고, 학비는 대구 방직공장에 가 있는 누님이 대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소장사 하시다가 육지로 나가
소식이 끊긴지 오래고 어머니는 4.3때 중산간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갔다가 변을 당한 후로 오누이만 살다 누나가 동생 공부 뒷바라지
한다고 동네 언니의 부름을 받고 대구 방직공장에 취직하여 1학년 때는 다달이 돈을 보내와 그런대로 지냈는데, 2학년이 되면서 어디 아프기라도
했는지 돈을 통 보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밥은 이 친구 저 친구 찾아다니며 먹고 수업료는 두 번이나 담임인 최 선생님이 대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친구가 두 번째 선생님이 수업료를 대납한 사실을 알고는 면목이 없어 선생님께는 편지를 써놓고 누나에게 간다고간다고 우기기 때문에 몇
사람이 차비를 모아 보냈던 것이다.
문이 열리면서 정환이 맨 먼저 나와 두리번거린다. 고 선생은 키는 자라지 않고 얼굴만
겉늙어버린 친구를 발견하고 그간 고생의 흔적이 역역했음을 느꼈다. 슬며시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
“정환이, 정말 오래간
만이다. 오느라 욕 받지?”
“야, 이렇게 쉽게 오능 걸 우째 35년을 버텨 왔드나. 그러고 보이, 내도 독하긴 독한
놈인갑다. 제주호 타고 부산 가면서 난 자신과 그케 약속 안했나. 내 크게 성공하기 전에 죽어도 고향땅 아니 밟겠다꼬.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니가 못 마땅해서였어.”
“정말 너, 너무 무정했다. 너 나보고 무어라 약속했나. 대구 가서 돈을 벌면 나도
불러 한몫 끼워주기로 해 놓고 이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으니, 그 당시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는 야속하기만 하드라. 자, 어디 가서
쉬면서 얘기하자.”
문상을 가기 위해 병원 영안실로 가는 도중 정환은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시간도 짧았지만 그의 이야기도 짧았다. 가는 길로 누나의 소개를 받아 직물 염색 공장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10년 전부터 그 공장을 인수 받았고, 인수 받은 다음부터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애써 노력한 공으로 밥 먹고 산다는
이야기였다.
병원 영안실에 놓인 영정 속의 선생님의 모습은 웃음짓는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평소 선생님 성품대로 분향만
허용되었지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고 선생은 결혼식 때 주례사에서 말씀하시던 ‘사람은 어디 가서든 자신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을 떠올리면서 꿇어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는 정환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이른 시간이지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부두 횟집 2층에 앉아 둘은 얘기를 시작했다. 정환은 객지에서 사업상 하도 변신을 많이 해서 그런지 벌써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엔 고 선생이 답답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박사장. 내가 못 마땅하다는 얘기는 무슨 말고?”
“너, ㅎ실고 학생과장이라믄서. 선생 노릇하면서 학생과만 했다믄서? 학생과 20년 넘게 있으믄서 학생들 억수로 퇴학시켰지. 넘의 귀한 자슥들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은사님 생각을 해서라도 좀 바줘야지.”
“야. 이건 진짜 억울하다. 누구의 어떤 모함에
걸려들었는지 모르겠지만 35년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난 지금까지 누구 억울하게 퇴학시킨 적 한번도 없어. 요즘 학생들
지가 싫어, 봐주려고 해도 지가 싫어 못 다닐 정도야. 아무리 나쁜 일을 했드라도 사회에 나가면 정말 낙오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설득하며 잡아두려고 그래 왔어.”
“아니, 너 정말 뻔뻔스럽기도 하다. 너는 기억이 안 날지 모르지만, 장난삼아 술 한 번
마셨다가 퇴학당해 억울한 사람을 내 직접 알고 있는데.”
“술 마시고 퇴학이라니? 응, 생각해 보니 딱 한 사람
있었군. 한 15년 되었나. 잊어버릴 수도 없어, 박재환이라고. 내가 담임이었어. 외할머니 밑에서 불행하게 자라면서 중학교 때 이미 폭력 산지파
서클에 깊숙이 어울린 거야. 그 당시 이곳에는 ‘산×파’와 ‘유×파’가 조직되어 밤낮 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는데, 경찰에서도 쉽게 뿌리를 못 뽑고
있었어, 그런데, 얘들이 3월 달만 되면 고등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신입회원을 포섭하는 세 불리기에 나서는 거야.”
“그렇다면 박재환이가 불량 서클에 가입했단 말이지?”
“아니, 네가 박재환이를 어떻게 알아?”
“시원히
말하지. 내 배다른 동생이야. 우리 아버지가 장사 다니시며 뿌린 씨앗이었지.”
“박정환 - 박재환,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맞아, 그러고 보니 그 때 외할머니가 ‘대구’에 누가 있긴 있으나 곤란하다고 했던 기억이 나. 왜냐 하면, 내가 외할머니한테 다 얘기했거든.
너무 깊숙이 빠져 있어서 본인이 독한 마음을 품고 다른 곳으로 탈출해야지, 제주도에 남아 있는 한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고. 알는지
모르겠지만 그 폭력 조직이란 것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쉽게 빠져 나올 수 없거든.”
“글타고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걸 사회로 쪼까버리면 갸는 어떻게 살아. 진정한 교육 자라면 경찰과 협력하든지 발벗고 나서 그런 걸 뿌리 뽑아야 하질
않아?”
“조직 폭력배라는 것이 그리 쉽게 뿌리 뽑히는 게 아니라는 걸 미국의 마피아나 일본의 야쿠자를 보면 잘
알잖아.”
“근대, 글마는 그런 말 않드라. 그 땐 우리 부부가 식도 못 올리고 단칸방을 세 얻어 살 때거든. 어떻게
찾았는지 하루는 갸가 지 외할머니 손에 이끌리어 집으로 들어선 거라. 와서는 우리 부부 손을 한쪽씩 쥐고 하소연을 하는데 형된 도리로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나. 더구나, 내 니 알다시피 배움에 한이 맺힌 놈 아니가.”
“그래, 변명하느라 날 죽일 놈
만들었구나.”
“와 아니겠어. 제주시에 가면 ㅎ실업고 학생과에 악질 선생이 하나 있는데, 친구 생일날 호기심으로 술
한잔 묵은 걸 가지고, 티 잡아 퇴학시켜 삣다꼬. 얼매나 악질인지 도내 학교마다 방방대서 다른 곳으로도 전학 모하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난
어떤 놈인지. 그 선생 정말 쥑일 놈이라 생각하게 되었지.”
“정말 심각했어. 박재환 그 녀석이 우리 반에서만 제일
똘똘한 놈으로 4명, 일학년 전체 10명을 포섭했드라니까. 머리도 좋고 말솜씨가 있어서인지 며칠 걸리지도 않았어. 그걸 알고서 어떻게 그냥
있겠어. 이들을 격리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징계위원회에서 생각해 낸 것이 퇴학 조치야. 다른 사람들은 퇴학 처리하는 것을 ‘다른 가지에
해악을 미쳐 나무 자체가 못쓰게 될 것을 우려하여 아깝지만 잘라버리는 전정(剪定)’에 곧잘 비유를 하던데, 그 이후로 나는 사람과 나무를
비유하는 그 발상 자체를 미워하게 되었어.”
“처음 재환이와 면담할 때, 나는 이 녀석이 어려서부터
어른들 틈새에 끼어 눈치만 보며 자라서 너무 영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책임지고 사람을 만들어 줘야 하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뒤에 그런
음모가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지. 알고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거야. 담임으로서 무척 고민도 많이 했다. 세상에
내 힘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느낀 것도 그 때였지. 그래서, 퇴학 처리할 항목을 찾았지. ‘상벌 규정’ 제13조 (7)항 ‘퇴학’ 항목을
보면, ‘외부의 불온 세력에 가입 또는 연계되어 불순 행위를 한 자’가 나와 있거든,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불온 세력’이라 할 때는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하거든. 그래서, (6)항 ‘무기정학 및 퇴학’ 항목 ‘집단 폭행 및 패싸움을 선동하거나 가담한 자’와 ‘음주 후 폭행 난동한
자’를 놓고 저울질하다 마침 그 때 두 파 행동대원들끼리 술을 마시고 당구장의 집기를 부수며 싸운 것 때문에 파출소에 연루되어서 ‘음주 후 폭행
난동한 자’의 규정으로 징계하게 된 거지.”
“그런 걸,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미워했구만. 야, 한 잔 들그래이. 이제
다 지나가 뿐 야기다. 그 때 난 결심했어. 야를 어떡허든 공부시켜 그보다 더 높은 대학 교수 맨들아 복수하그로. 그래서 우리 부부가 자식
맥그로 뒷바라지 했제. 본인도 열심히 따라 주드마. 없는 살림에 박사꺼정 다 거치고 대학에 적을 두게 되사 보람도 생기면서 집안 형편도 펴게
되드라. 오히려 퇴학시킨 선생이 고마울 정도라.”
“아니, 그러니까 재환이가 대학교수가 됐단
말이가?”
“그래. 그것도 대구에서 알아주는 K대 교수 아니가. 작년에 전임강사에서 조교수 되었다. 나도 대학교수 헹님
아니가. 나 서울 Y대 대학원에서 가가 박사학위 받을 때 어떡했는 줄 아나. 식이 끝나고 옷을 입은 채로 나오드만 다짜고짜 옷을 벗어 나를
입히는 거라. 모자도 씌우고. 곳곳에 돌아다니며, 사진 억수로 찍었다. 외로운 놈이 피붙이 동생 하나 얻어, 시상 소원풀이
다했다.”
“그런데, 내가 퇴학시켰다는 건 언제 알았지?”
“그 노마가 K대에 전임강사로 확정된
날이사 알았다. 처음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해 하드만 날이 갈수록 잠잠해 지는 거라. 그 후 맘을 잡은 뒤부터는 오히려 그리워하는 눈치드만.
그런데, 취직자리가 결정 된 날 나하고 축하주 한 잔 했지. 그 자리에서 말하는 거라. 그 동안에 지가 거짓말한 것을 고백하면서 선생님을 한 번
찾아 봤으면 싶다꼬.”
“그런데, 나를 죽일 놈이라 한 건.”
“그것도 모르나. 이름을 대는 것
보니까. 네 이름이라. 그라믄 이 노마가 틀림없다고 생김새를 말했더니, 니가 아니냐. 야, 세상 좁고도 좁더라. 와 하필 너냐. 너 최
선생님이랑 우리 어렵게 공부할 때 생각해 봐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디 짜르겠냐. 너는 스승님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
생각하니까, 눈에 불이 확확 일고 정말 달려 와 쥑이고 싶도록 밉드라.”
“나도 니 동생 퇴학시키고 한 동안은 괴로워
혼났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학생과를 떠나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 뒤로 본인이나 학부모가 싫어 학교에 안 나오거나 실정법으로 어쩔 수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르는 일은 없었다.”
“근데, 니 좀 대구 한 번 들러야겠다. 이 노마가 지 결혼식에 널 주례로
모셔야칸다고 안 우기냐. 양심적이고 본 받을 만한 교육자라고. 이번 가을이다.”
“웬수가 은인으로 변했네. 아무리
그래도 잘 되니까 하는 소리지. 안 됐어 봐라. 그야 말로 평생 원수로 생각했을 거 아냐. 어디 대학 교수 결혼식에 신랑을 퇴학시킨 고등학교
평교사가 주례를 서냐. 뜻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니 고씨 고집만 고집인 줄 아나. 박씨 고집도
상당하다이.”♥
(사진은 비양도, 최현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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