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내 고향 곽지 마을

김창집 2010. 8. 22. 23:49

 [길을 나서다]

 

                                          내 고향 곽지마을

*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삶과 문화』 2010년 봄호(통권36호)에 실렸던 글.

 

                                                     * 눌우시 동산에 서 있는 우리마을의 상징 문필봉

 ♧ 길을 떠나며


 올 3월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달이다. 35년 동안 몸담았던 정든 교단을 떠나 제2의 인생길을 가야 하는 시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흘이 넘는 지금까지 그간 지속돼온 지연(地緣),혈연(血緣), 학연(學緣)의 끈에 얽매어 그와 관련된 일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작금의 사회에서는 그게 사람 구실인 것을…. 하지만 길을 떠날 때만큼은 연줄을 잇는 휴대폰을 꺼버리고 용감하게 떠날 일이다.

 

 차를 모는 곳은 내 태(胎)를 손 곽지 땅이다. 그제 입적(入寂)하신 무소유 법정(法頂)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매사에 임할 때 크게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태어나 자란 마을에 가서 옛일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어머님을 시내로 모셔다 임종을 맞은 뒤부터 그 동안 차로 40분이면 닿을 곳을 왜 그리 멀리 했는지 모를 일이다. 과오름이 너그러운 미소로 지켜주고, 진모살 긴 백사장이 바다를 잠재우는 그 고향을….


                                                                              * 패총이 있는 섯물질의 간판

♧ 섯물질에 들어서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빠져나와 서상동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을 걷는다. 이곳이 ‘섯물질’이다. 달리 식수를 구할 수 없었던 윗동네에서 바닷가에 위치한 용천수인 과물로 물 길러 나르던 길이다.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나다니던 길이기도 하다. 특히 모래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조개들을 잡아다 먹고, 좀처럼 썩지 않은 껍질을 그릇에 넣어두었다가 물때가 되어 다시 잡으러 가면서 일정한 곳에 버린 조개무지[貝塚]가 있다.

 

 ‘곽지패총(郭支貝塚)’이란 표지판이 있는 밭에는 지금도 토기 파편과 조개껍질이 한데 섞여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곳은 1973년에 처음 발견되어 1979년 12월과 1984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결과 넓게 펼쳐진 대규모 유적으로 드러났는데, 크게 3지구로 나뉜다. 유물은 거의 겉흙층 아래의 제2층에서 나왔다.

 

 출토 유물을 보면 골아가리그릇, 구멍무늬그릇, 항아리, 김해토기 등 질그릇과 그물추, 가락바퀴 등 흙제품이 많고 도끼, 공이, 돌칼, 끌, 자귀, 홈돌, 갈돌, 갈판, 그물추, 숫돌 등의 석기, 칼자루, 송곳, 뿔연모 등 뼈뿔 제품과 손칼, 끌 등 철제 연모, 그밖에 많은 짐승뼈와 조가비 등 자연유물들이 있어 당시의 풍부한 문화 내용을 알려준다. 질그릇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3층과 4층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성격을 띠며, 2층에서는 입술이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김해토기가 특징으로, 경상도지역의 철기시대 초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과물 입구에 서 있는 열녀 김천덕비 

 

♧ 답단이에서 구린질을 거쳐 오도롱고망까지


 섯물질에서 돌아서서 이번에는 조개껍질을 버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상동으로 간다. 그 중심에 답단이가 있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연못이었던 그곳은 지금 모두 메워져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고, 나이 든 팽나무 한 그루만이 말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이웃마을인 봉성리와 금성리, 동쪽으로 조금 더 가서 납읍리로 통하는 네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된다.

 

 ‘이곳에 고씨 성을 가진 세력가가 있었는데, 안하무인으로 행동을 하며 인근 사람들을 괴롭혀 원성을 샀다. 그즈음 고씨가 아름드리나무를 베다 고대광실 높은 집을 짓는다. 이웃사람들은 그 행동에 눈꼴이 사나와 관가에 가서 대궐보다 더 큰 집을 짓는다고 거짓 고했다. 관가에서는 그를 추궁하면서 짓던 집을 허물어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게 이곳에 탑을 세우게 된다. 하루는 한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 아무도 잠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 탑 아래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땅속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는 그것을 미끼로 “나를 소홀히 대접하면 큰 일이 생긴다.”면서 후한 대접을 청했다. 그래도 이웃사람들이 반응이 없자 홧김에 “이곳에 이 탑을 세워 마을의 맥을 끊었으니, 앞으로 망하게 된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 말을 들고 마을 사람들이 탑을 부수는데, 탑 속에서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가 버렸고, 이후 이 인근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아쉬운 전설이다.

 

 그곳에서 구린질을 거쳐 오도롱고망으로 향했다. 이웃마을인 봉성리로도 통하는 길이다. ‘구린질’이나 ‘오도롱고망’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오도롱고망’은 낮에도 음침하게 보일 정도로 깊은 궤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그 방향에 탑을 쌓고 거욱대를 세워 사악한 기운을 막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밭담 중간 둥근 탑에 거욱대를 세우고 까마귀 같은 새를 잡아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탑 위에 송악만 무성하다. 다만 굴 앞에 심어놓은 수령 150년 정도의 소나무만 위엄을 자랑하며 제 구실을 하고 있다.


                                                               * 어렸을 적 소물  먹이러 다녔던 버들못  

♧ 버들못에서 성질까지


 동상동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버들못’은 제주올레 15코스에서 유일하게 거쳐 가는 곽지리 지경(地境)이다. 넓은 빌레 한쪽에 자리한 그리 넓지 않은 습지인데,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소에게 물을 먹이거나 농업용수로 써왔다. 버들못은 ‘곽지8경’중의 하나로 ‘유지부압(柳池浮鴨)’이라 하여 버드나무가 서 있고, 오리가 한가히 노닐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을 사용하지 않아 초라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집집마다 소를 기르던 시절, 이곳은 소의 놀이터였다. 봄이 되어 외양간에서 겨우내 다리 오그리고 지내던

황소들을 몰고 오면, 오금을 펴기 위해 날뛰다가 고만고만한 상대를 만나면 서로 흘기며 쉽게 한판을 벌인다. 우리집은 암소 여러 마리를 길렀기에 자주 이곳에 물 먹이러 와서 소싸움을 관전하곤 했다. 늦게 농사일을 끝내고 밤에 소 물 먹이러 온 날에는 어찌 그리 도깨비불이 많던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머리발이 곤두선다.

 

 ‘성질’은 납읍리 하동으로 통하는 길에서 과오름 쪽으로 난 길이다. 그곳에는 조그만 못이 있었는데, 그를 의지하여 곽지마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몇 가호 모여 살던 곳이다. 이주해온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일부 마을사람들이 추측하기를,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비양도 화산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해일(海溢)에 관련되지 않았나 보고 있는데, 이곳 외에도 어음리경 속칭 ‘돌객이’에도 옮겨 살다가 4.3때 소개해버린 집터만 남아있다. 가끔 소 물 먹이고 오던 성질의 못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 마을의 역사를 지켜본 젓머를 폭낭  

 

♧ 진올레에서 등틍거리를 거쳐 젓머를까지


 내가 살던 곳은 납읍으로 오르는 길에 위치해 있어, 그 아래에 ‘진올레’ 안에 있는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이 긴 골목 안에는 여덟 가호가 살았는데, 처낭굴, 큰안골, 족은 안골, 젓머를 동네 등 동동네만 해도 10가호를 넘나드는 골목들이 많다. 진올레 안은 또래들이 많이 살아서 자주 가 밤늦도록 놀다오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 골목어귀에 연자방아간이 있어, 그 속에 장례 때 사용하는 도구를 놓아두었기 때문에 지나다니기가 무서웠다.

 

 진올레 어귀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등틍거리’가 있다. 그곳 삼거리 팽나무 그늘에는 언제나 어른들이 모여 놀아서, 지나칠 때는 반듯하게 인사를 해야 했다. 옛날 이곳을 지나치는 힘깨나 씀직한 외방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마련해놓은 듬돌을 들게 하여 곤경에 빠뜨렸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길을 넓히면서 서너 그루의 팽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유서 깊은 마을의 풍모를 잃은 지 오래다. 

 

 거기서 더 내려오면 ‘젓머를폭낭’이라 이름 붙은 팽나무와 조그만 정자가 있다. 열 살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많이 올랐던 나무이다. 길을 넓히면서 베어버리려는 것을 마을 어른들이 말려 못 베게 한 수령 300년이 넘는 노거수다. 지금도 마을의 어르신처럼 고향마을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이번 나들이에서 변치 않고 나를 맞아준 존재라고나 할까?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는데, 송씨할망당이 있던 자리에도 팽나무 두어 그루가 남아 있었다.


                                                                             *절쉬엉 팡과 그뒤 말젯오름  

 

♧ 절쉬엉을 거쳐 중질, 과물까지


 과물질 상하동 중간에 ‘절쉬엉’이라는 물팡이 남아있는데, 과물을 허벅에 길어 물구덕에 지고 막 올라와 부려놓고 잠깐 쉬는 곳이다. 물팡에 놓인 잘 다듬어진 기다란 돌은 고려 때 ‘곽지사(郭支寺)’라는 절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곽지현성이 있던 고려시대에는 곽지사 외에도 ‘묘련사(妙蓮寺)’라는 절이 더 있었다. 담수계가 지은 ‘증보 탐라지’에도 나오며 고승 혜일(慧日)이 찾아와 시를 남길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절왓’, ‘시구터’, ‘중질’, ‘사고질’ ‘절쉬엉’ 등의 관련 지명만 남아 있다.   

 

 한질을 넘어 과물로 내려간다. ‘과물’은 해수욕장 입구에 자리한 용천수가 풍부하게 나오는 곳을 둘러 만들었다. 옛날에는 물 긷는 칸과 빨래하는 칸으로 나누고 밖으로 소 물 먹이는 곳을 설치했었다. 이곳 빨래를 하는 어머니 곁에서 헤엄을 배우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시험에 통과되어, 비로소 옆에 있는 남자 목욕통으로 옮기면서 넓은 바다로 나오게 된 의미 있는 곳이다. 그 동안 나는 본토로 해외로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 옆에 펼쳐진 ‘진모살’이라는 해수욕장은 2008년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전국 가보고 싶은 해수욕장 4곳’에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해변이다. 어렸을 때는 그곳에서 조개와 고기도 많이 잡고 멸치를 후리는 ‘멜팟’ 구경도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옛 모습은 점점 사라져간다. 상전벽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번쩍번쩍 빛나게 치장해 놓았다. 과연 개발과 보존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 모래가 곱고 물이 맑은 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