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만에 오름오름회 식구들이랑 오름에 갔다.
먼저 우리가 맡고 있는 1단체 1오름 가꾸기 장소인
왕이메에 들렀다가 아침 바람에 고요히 나부끼는
이 억새와 마주쳤다.
11월말의 찬 공기는 어서 모두를 버리라 하는지
능선에 있는 억새들은 벌써 씨를 다 날리고
가벼운 자세로 몸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조락의 계절, 힘겹게 쥐었던 것을 서서히 펴
어려운 이웃에 나눠줄 때가 온 것이다.
♧ 겨울 억새 - 유소례
제 철 넘어
무덤 터 지나도록
대궁 속으로 숨 쉬는 억새는
산기슭 낮은 자리에서
재넘이 바람매에 벼린 칼날이다
억센 척추 세워
햇볕 가루 구름 비늘에 비며 삼키며
가슴 안에
마르지 않는 꿈
헤아리며 살아간다
때론 휘휘한 목 안에
모래가 버석버석 할지라도
큰 숨 뿜어 허공에 날리고
밤안개에 젖은 살갗
툭툭 털어 바람에 실어 보낸다
해가 진 계절의 억새
살과 살이 서걱대는 울음은
속심지에 고인 삶의 울분을 지워내는
방언이라고.
♧ 억새 - 청하 권대욱
익숙하지 않은 길
홀로 창공을 헤맨다
섣달 초사흗날부터
놋쇠소리 내는
날 선 바람에도 굴복 않았던 육신이
삭막한 벌판에서
풀어헤친 오지랖은
낯선 계절의 여백을 버티고 있다
말없이 만들어준 메마른 세상 속
수줍은 온기라도 더하면
창백한 숨소리 고르는 나는
유연한 생존을 체험하고 있다
광야의 길 복판에 선
너처럼.
♧ 억새 - 정윤목
키 높이
부드러이 기다려
마른 몸 세워
하늘 향해
가슴 내보이는
오래 된 꿈의 씨앗
살그머니 열어
허공으로 부르는
오래된 나눔
두둥실
멀리서도 닿을 것 같은
오, 그 떨림
♧ 억새 - 동호 조남명
칼날 잎 서슬 퍼렇던 억새풀이
찬바람 된서리에
흰 누렇게 빛바래 일생을 마감한다
세월 앞에는
억셈도 그 무엇도
몸부림인 것
짧은 생이 한이 되어
죽은 뒤 더 꼿꼿해진다는 억새대는
수척한 제모습에 서글퍼 운다
바람에 다소곳하면서도
솜털 씨앗 날려 번식을 잊지 않는
억새꽃
제자리에 뿌리내려
다른 곳 넘보지 않고
어느 것도 탓하지 않으며
바람에는 누운 듯하다가
세월이 다하면
존재를 마치는
억세지만 연약한 풀이 억새이어라.
♧ 억새꽃 - 구재기
나는 아직도 매일처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피었다 진다
흔들리는 나의 작은 가슴에 가득
소리 없는 꽃잎으로 피었다 진다
반도의 땅 산비알 밭둔덕에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땀을 흘릴지니
새하얀 억새꾳, 피면서 흔들리어라
메마른 억새꾳, 지면서 흔들리어라
어머니 묻힌 산기슭을 돌아 내려오노라면
달은 무서리에 더욱 푸르러지고
바람은 무서리에 더욱 거칠어 지나니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뿌려라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두 눈을 감았다 뜨리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나는 또 피었다 진다
♧ 억새 바람 - 목필균
묻지 마라
사금파리로 새겨진 이름 하나
이제쯤 지웠느냐고
해마다 쌓는 그리움의 벽
무너져 내리는 가슴팍에
하얗게 일어나는 상념 비늘
탈탈 털어 내려 아우성치는
저 울음소리
♧ 죽은 억새를 위하여 - 김수열
겨울비 내린다
억새를 예찬하던 축제는 끝났다
축제를 기억하는 건
사라져버린 폭죽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휘청거림
억새가 죽고 가을이 끝났다
가을과 함께 억새들도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은 괴괴하다
죽은 억새는 죽어서 살아 있다
억새꽃 백발이 성성할 무렵
이파리는 앞 다투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땅바닥에 머리를 베고 미련 없이 떠났다
죽어야만 산다는 걸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 땅에 머리를 박은 뿌리는 더욱 처연했다
실핏줄은 죄다 잘라내고
팔 다리도 아낌없이 떨쳐버리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대고
오로지 가슴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야지만 그나마 살 수 있다는 걸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야지만 먼 길을 돌아온 억새꽃 하나
여기 설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겨울비를 받아들이는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억새꽃 - 오세영
흐르는 것 어이 강물뿐이랴.
계곡의
굽이치는 억새꽃밭 보노라면
꽃들도 강물임을 이제 알겠다.
갈바람 불어
석양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일렁임,
억새꽃은 흘러흘러
어디를 가나.
위로위로 거슬러 산등성 올라
어디를 가나.
물의 아름다움이 환생해 꽃이라면
억새꽃은 정녕
하늘로 흐르는 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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