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서 사랑의 열매가 연상되는
죽절초 열매가 익어간다.
크리스마스를 향해 달려가는 추위 소식과 함께
정열의 화신처럼 소담스럽게 타오른다.
우리는 사립학교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같이
근무했던 교사라면 적어도 30년 이상 한솥밥을 먹었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정년퇴임 선생님들이
모임을 만들고 매월 마지막 월요일에 만나고 있다.
엊저녁 뜨거운 해물탕에 소주를 마시면서
꺼낸 화두(話頭)는 아무래도 건강과 걷기가 주였다.
더구나 비슷한 또래의 친지 부인이 폐암으로
돌아가 그 빈소에 조문을 다녀온 후이기에
나누는 얘기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 만추 - 배한봉
열매를 달지 못하는 나무는
하늘로 팔을 쳐들고 벌을 쓰지만
열매를 단 나무는
팔을 늘어뜨린 채 출렁인다
보아라, 악착같이 매달린
살찐 열매들 건사하느라
뼈마디마다 힘을 꽉 주고 있는 나무들
햇빛이 눈부신 것은 열매 때문이 아니라
무겁게 휘늘어진 저,
영혼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세상에서 제일 힘센 팔 다리를 만난 거다
노동의 순결을 아는 자만이
가 닿을 수 있는 나무의 나라
아, 나는
감은 따지 못하고
눈만 자꾸 비비고
♧ 만추晩秋 - 진의하
하늘을 치솟는
불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러나
119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소방대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쏟아지는 불꽃 속에
가을 산은
주저 않고 있었다.
♧ 만추(晩秋) - 김하인
석양이 지고
꽃 져내리고
어둠이 져내려
모든 세상이 지고 져내림으로만 가득할 때
한 사람의 그리움이 지고
마음이 지고
외로움마저 떨어질 때
새벽이 지고
사랑도 지고……
♧ 만추晩秋 - 이정웅
늦가을 산이 골짜기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간다
빛 몇 자락 짊어진
마른 물길이
비척비척
따라 올라가는
헐렁한 짐 속엔
아직 내려놓지 못한
가랑잎 몇 점
삐죽이 내밀고 있다
♧ 만추 - 정군수
숨어있던 내 작은 뜰에도
낙엽들이 몰려와
가을은 어디에도 지천이다
남루를 걸친 사내가
가을을 껴안고 뒹굴다가
불려온 바람 속으로 침몰한다
잎 진 가지 사이로
하늘을 기대고 선 나무들이
인간보다도 고독하다
죽어 넘어진 나뭇잎들이
구르는 차바퀴 아래로
또다시 몸을 던진다
쇳소리보다 날카로운 달이
여인의 냉소처럼 떠있는
도시의 건물 사이를 지나
장례식장으로 가는 불빛들이
가을 속으로 잠겨간다
♧ 만추(晩秋) - 권경업
야윌대로 야윈 오후 햇살
누런 떡갈나무 숲에서
울먹이다 떠나가고
밤마다
별이 되어버린 그리움들이
내 잠든 천막 위
세월 하얀
서릿발로 내려 앉았다.
소슬바람에
앙상한 이 계절이 아름답다는 것을
허튼 제 약속
허둥대며 쫓아 온 마흔 해
이제야 알았음이니
♧ 만추의 풍광 - 반기룡
하늘은 쨍쨍하다
톡 건드리면 툭 터질 듯
투명한 유리처럼 비친다
뚝뚝 낙엽 떨어지는 소리는 고막을 간지르고
얼음짱처럼 서늘한 기운은 살갗을 부풀리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낙엽 한 잎 거칠게 애무한다
산마다 수액이 어느덧 가뭄을 이루고
잎맥은 닫힌 채 머지않아 오실 손님 마중하듯
바스락거리며 이리저리 뒤척이고
바람 따라 자맥질을 반복한다
아직 계절에 순응 못한 뱀딸기가
붉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희죽거리며 응시하고
저 멀리 가죽나무는 찬 바람을 이겨낼 태세로
온 몸에 가죽을 단단히 두르고 있는 듯 하다
만추의 풍광은
사라지는 것과 살아나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잣대인 듯하다
♧ 만추의 들녘 - 홍윤표
긴장된 상강의 들녘은 마냥
외로움이며 중년의 외침에 가을을
타작하며 돌아 눕는 겨울 추녀는
진한 낙숫물이다
님이여!
외로운 들녘을
뜨거운 가슴으로 채우자
차 한 잔에 추억을 심을
너와 나의 언약
서리꽃이 피었다
바람이 차갑다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미루나무가 될까
서해의 일몰은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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