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유독 빨간 열매가 눈에 띈다.
지난 일요일에 올랐던 노로오름 정상에 이르렀을 때
유난히 눈에 띄는 이 청미래덩굴. 해발 1천m가 넘는
산 정상인데도 북풍을 막아주면서 햇볕이 잘 비치는
남향에 조금 색이 바래긴 했으나 아직도 잎을 매단 채
이렇게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고 있다.
요즘 망년회 철이 돌아와 어떤 날은 두 세 개가 겹치고
모임들마다 정기총회로 또는 정기총회 준비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하긴 모임의 결속도 중요하고, 하는 일의
맺고 시작함도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저 빨간 열매처럼
얼어붙은 이웃을 녹여줄 훈훈한 인정이 그리운 때다.
청미래덩굴은 망개나무라고도 불리는 백합과의
낙엽 활엽 덩굴성 관목으로, 줄기는 마디마디 굽으면서
2~3m 정도 자라고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원형
또는 넓은 타원형으로 덩굴손이 있다. 5월에 노란색을 띤
녹색의 단성화가 산형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둥근 장과로
9~10월에 빨갛게 익는다. 애순과 잎은 식용하고 뿌리는
약용하며 잔뿌리는 한 줌씩 묶어 솔을 만드는 데 쓴다.
♧ 그대 세월의 강 - 박종영
들국 꺾어 주던 고개에선
그대 생각으로 눈물 한 방울
감추지 못한다
산에 들면 추위 타는 나무마다
어쩌자고 마른 숲에 그리움을 풀어놓고
눈물 바람인가 싶어 짠하고
겨울나무 잎 진자리 가릉대는 소리
마음으로 어루만지면
오돌오돌 붉게 추위 타는 청미래덩굴
감싸 안고 싶은 것은
의지하며 느긋이 살아온 길
이쯤 하여 창창하지 못한 인생 탓하려 해도
대나무숲 잉걸이는 소리
내 울음 같아서
그대 세월의 강에 안기고 싶은 부끄러움
♧ 오솔길 - 최제형(源谷)
함께 가실까요
우리 마음의 고향
황금 벌판 사이 미루나무 치솟고
신작로 너머로 저수지가 보이는
쑥부쟁이 벗삼아
노을지는 석양 빛 건너
살랑이는 단풍 잎 아래로
싱그런 바람일랑 가슴에 가득 담고
고리한 세월에 찌든 마음속까지
탁탁 털어내 보실까요.
겨울이 오기 전 우리 가슴에도
멍가 같이 빨간 열매
주렁주렁 맺어보자고요.
............
*멍가 : 명감나무(청미래덩굴)의 충청도 사투리
♧ 화순기행 - 홍해리(洪海里)
진달래 버는 남녘땅
뱀들도 눈을 뜨고
난초꽃 무더기 속에서 수런거렸다
쑥 냉이 냄새가 묻어나는
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노랫소리
높은 음계로 계집애들이 불러댔다
청미래덩굴과 가시나무 사이로
토끼똥도 보이고
멧돼지 말자국도 찍혀 있었다
앞산 양지쪽에서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겨울을 넘기고 놓은 목숨을 묻고
마알간 잔디의 실핏줄을 밟으며 밟으며
울고 있었다
노랑나비 날개 위로
봄날이 기울고 있었다.
♧ 냄새의 방 2 - 김철식
다시 겨울의 살육이, 불어오고 있다.
나는 목덜미에 지울 수 없는 오랜 허기를 두르고
털털털 털털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창틀을 흔들던 바람이 한순간 폭발하듯 덮쳐온다
지난날 도시의 밤골목을 배회하던, 추억을 호명하며 잠이 든 피의 조각들 사이로
광휘를 휘날리며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거리의 불빛들, 저 불빛을
포박하던 태고의 노래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바람의 뒷전에서
파탄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홀로 춤을 춘다
연기 피우지 못하는 청미래덩굴 뿌리처럼
내 파탄의 중심에는 사랑도, 뜨거운 눈빛도 없다
누런 벽지에 얼굴을 대니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 갈비뼈가 등에도 뻗쳤음을 내 몸을 보고 알겠거니
육신조차 야박히 날 비켜가는가
함성이 아름다웠던 이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신념은 고달프고, 남은 시간은 뼈처럼 하얗다
세기말의 풍광은 몇몇
설핀 말들에 묻혀 처참히 주눅들었다
심야의 허리를 분지르는 죽음의 냄새, 세기말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나는 추억을 잃고 달팽이처럼 퇴행한다
굴할 수 없는 어둠의 살들이
거대한 전차(戰車)처럼 덮쳐오는 악몽의 도시에서
나는 파멸의 냄새를 피우면서
춤을 추고, 냄새에 갇혀
구들장 밑으로 숨고, 또 숨어든다
고생대의 뼈 없는 벌레처럼
♧ 불씨 - 최진연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구나.
울울한 森林삼림을 불태우고
暴雪폭설에 묻힌 산허리에 박힌
보석의 망개처럼
빨갛게 살아 있다니.
四季사계의 결론들이
빈 가지에서 엇갈리고 마주치는
나무들의 드러난 뼈를 보면서
그대 변절을 보복하지 않고
내가 떠난 스무 살 전후
이글거리던 불꽃이
마로니에 짙은 그늘에서
아직도 너울거리고 있다니.
나의 잠을 틈타서
눈을 뜨고
한 채의 가산을 깡그리
재로 남긴 불씨야,
질화로가 된 가슴
삭은 재 속에
아직도 5월의 앵두처럼
빨갛게 살아 있다니….
♧ 겨울 나그네 1 - 양채영
눈 섞인 바람이 분다
오라는 이 없어도 가야 하리
얼까말까 망설이는 개울을 옆구리에 끼고
붉은 망개열매와 멧새 떼에 길을 물어
마른 풀잎 쓰러져 흩날리는 논밭뙈기를 지나
술렁술렁 걸어서 가야 하리
내 조선시대 사모하던 선비들의 기골을 닮은
잡목숲과 낙낙장송과 거친 암벽이 솟아 있는
이 나라 눈 덮인 산악을 우러르며
산가마귀 우짖는 산협을 지나면, 어디선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명년 춘삼월에 돌아올까
어―허이 어―화
건 쓴 상제들과 상여꾼과 선소리꾼이
흰 겨울산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들의 슬픔도 갖고 싶던 모든 것들이
눈발 속으로 날아가고 산은 더 높고 깊다
고사리국에 밥 한술 말아먹고 소주 한 잔 걸치고
무너진 산성을 지나면 호도나무 과목들 사이로
푸르딩딩한 냉이잎이 얼어있고
신라적 암각된 마애불이 길손을 맞는다
그는 이 산과 바위와 바람과 더불어
수척한 길손을 지키며 바랜다
흰 눈벌에 모여선 낙엽송숲의
자잘한 가지들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겨드랑이를 끼고 겨울바람을 막아
수묵화처럼 허공중에 부풀어 있다
그 속에 누군가 저녁 등불을 켜고
그 머리 위로 겨울새떼가 돌아가고 있다
나는 것도 모여 있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모두 춥다. 모두 간다. 모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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