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노로오름에 다녀왔다. 처음엔 한라산에 눈이나 보러
가자며 나섰지만, 눈을 보려면 적어도 한라산 1,500m고지
이상 되는 곳에 가야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정 코스론 주차
때문에 힘들겠다고 여겨 조금 높은 곳에 간다는 것이 해발
1,070m의 노로오름이다.
오늘은 안천이오름 옆으로 들어가는 코스다. 차가 멈춘 곳에
세워진 ‘1단체 1오름 가꾸기’ 담당은 섬오름동우회다. 먼 곳에
입구에 세운 간판 때문에 처음 찾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기
십상이겠다. 9시35분에 출발, 숲 사이로 난 아담한 오솔길을
걸으며 괜히 행복감을 느껴본다.
이번 비로 잎이 다 져버린 나무들 사이 작살나무의 열매가
드러나 그 앙증스런 모습과 빛깔이 한층 더 예뻐 보인다.
조락의 계절, 이미 퇴색해버린 낙엽이 발길을 부드럽게 하는데,
이번 비에 떨어진 마지막 단풍잎이 가끔씩 나타나 우릴 반긴다.
이제 이 높은 지대에에 초록이라곤 가끔씩 나타나는 주목이나
굴거리 같은 상록수 외에 소나무, 삼나무밖에 없다. 족은노로오름
분화구에 도착 간식을 즐기는데, 그 말라버린 풀들 위로 파랗게
솟아난 게 보인다. 바로 이끼들이다. 바위나 나무 둥치에 파랗게
솟아오른 이끼는 이제부터가 이 오름의 주인이다.
겨우내 적당한 습기와 가끔씩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자라고 한동
안은 눈속에서 지내다가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세상
을 즐길 것이다. 이끼는 선태식물 지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대체로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고목이나 바위, 습지에서 자란다.
♧ 이끼 - 임혜신
상냥한 그대, 그대가 비록
맑고 쾌활한 호수 같이 눈부시고 청정하나,
그러나, 그러하나, 왠지,
그대 또한 어느 모호한 안개의 거리
은밀한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으로 혹시
밤잠을 설치고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다가와 봐
낮은 곳에 서식하는 내게
눈물의 발아래 기생하는 푸른 식물에게
선택되었던 자와 버림받았던 자
행복했던 자와 불행했던 자, 그렇게
믿었던 자와 의심했던 자들의
살과 뼈에 자라나는 촉촉한 깃털들에게
어둠 속에서 더 잘 번식하는 용서의 입술에게
한 마리 승냥이가
깔고 안기 좋을 만큼
밟고 걸어다니기 더 좋을 만큼 고요한 양탄자
속죄하는 짐승의 어깨
길게 갈라진 슬픔의 상처를
끌어안고 타오르는 오, 나지막한 불의 가슴에게
내가 알려주지
그대가 근심한 시간과
공간의 저 신비한 희생자들이 모두,
어디서
얼마나 평안히 쉬고 있는 지를,
♧ 우산이끼 - 이창호
둥근 달이 뜬 달동네 우리 집, 우리 어매 살아생전 둥근 궁댕이 같은 좁은 부엌, 졸졸졸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 가을하늘보다 더 파랗게, 이끼가 피어나 백촉 전등 불빛에 반짝입니다. 하수구 물 흐르는 곳에서 울 할매 밥 짓다가 신기한 듯 영희랑 철희랑 불러 ‘드물게 이런 달동네 오두막집에서도 달 아닌 새 생명 방문하듯 자라 순박한 이야기가 되다니’ 하고, 우리들 그 서럽게 굳은 표정 속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파랗게 돋았습니다.
우리 집 아배 공사판 인부로 이끼보다 탁한 목숨, 여러 해 살더니 무너지는 골재에 머리 맞아 보상 없는 식물인간 되어 녹십자 병원 중환자실에 누웠습니다. 병원 찾던 우리 어매 단칸 방, 지옥살이 탈출하듯 무면허 화물차에 먹힌 뒤로는 우리 고2 누나, 다니던 학교 그만두고 부산역 근처 양키시장 작은 오락실 동전 교환원으로 동전 몇 닢 같은 젖은 눈망울, 늦은 달 뜰 무렵에 무거운 어깨, 허리춤에는 시린 달빛 안고 돌아옵니다.
하수구 같은 터전 위에도 맑은 이끼가 돋는데, -어른들은 그 이끼가 이런 구석에서는 드물게 피는 우산이끼라고 했다.- 동네 아줌마, 식은 밥이라도 몇 그릇 주고 가는 날이면, 드물게 우리 집안에서도 배 불러 보는 행복같은 것이라고도 있어서 ‘아 배불러’ 파리처럼 방벽에 가서 기대어 누워서는 내 동생 영희, 바퀴벌레처럼 잠이 들었습니다. ‘불쌍한 것들’ 저녁 늦게 들어온 우리 누나, 제대로 먹지 않아도, 배부른 듯 그윽하게 굽어보는 눈빛에 반짝 슬픔이 돋아나고, 부엌에 나가 이끼 바라보며, 눈물 떨굽니다.
우리 집 이끼는 할머니의 눈물, 누나의 눈물, 가끔은 내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수채구덩이 같은 우리 집에서 저리도 곱게 우산이끼 자라듯 우리 아버지 다시 돌아와 우산이끼처럼 다시 파랗게 움이 돋듯 기둥 세우고, 우리 눈물 먹고 하얀 꽃을 깨끗하게 피우듯, 웃음 머금고 우리도 이끼처럼 자랄 것을 바랍니다. 우리 억샌 할머니, 누나, 내 동생이 잠든 머리맡에 작은 두 손 꼭 쥐고, 내 입술에 파랗게 우산이끼 자라도록 오늘은 기도를 할래요.
‘힘을 주세요. 엄마’
♧ 이끼나무 숲으로 가자 - 김희경(color)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든
이끼나무 숲으로 가자
삶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고 싶거든
평화의 땅 뉴질랜드 이끼나무가 있는
숲으로 가자
온몸은 상처투성이
모두들 창문 걸어 잠근 계절에
안식을 찾지 못한 가슴 위로
피슬피슬 안개꽃 피어오르고
나는 목마름으로 햇빛을 찾아 헤맨다
피곤에 지쳐 잎도 꽃도 외면한 늪 속의 삶은
밤마다 이별을 향한 노래 부르네
참 평안이 거기 있다 쓸쓸이 아름다운 곳
새도 없어 적막한
이끼나무 숲으로 가자
♧ 이끼 - 김순남
꽃그늘이 아니어도 좋다.
바람이 지날 때
사랑의 말 한마디
전할 수만 있다면
흙이 아니어도
썩어진 나무 등걸
단단한 바위라도 좋다.
총총 박혀드는 햇살
한나절 가슴 태워
그리움으로 짙푸른 심장
마주 바라보며
사랑의 말 한마디
주고 받을 수만 있다면
꽃그늘이 아니어도
꽃그늘이 아니어도 좋다.
♧ 이끼 - 임영준
흘러가는 세월에
순순히
녹아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묵직한
바위가 된 것도 아니다
그저 어정쩡하게
흐느적거리다가
결국은 삭아버리고 말
이끼가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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