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가물어 애를 태우더니
가을이 깊어지면서 비 날씨가 너무 잦아진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기온에 가 익어버린 밀감이나
다 자랐지만 팔지 못해 그냥 놔둔 양배추와 배추들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손을 놓고 있는데
무심한 하늘은 연일 비만 뿌려댄다.
대설(大雪)에도 아랑곳 않고….
지금 제주에는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동백꽃이 붉게 피어
제주 땅을 물들이고 있다. 이 애기동백도 그 중 하나다.
10여 년 전부터 섬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원래 있던 재래종 동백을 능가한다.
잎사귀와 나무의 크기가 작아 애기동백으로 불리지만
꽃이 크기나 숫자는 그냥 동백을 몇 배 능가한다.
♧ 대설(大雪)에 겨울비 - 최홍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백두대간 고요한 자락에 산불도 요란했는데
겨울비, 빗줄기가 제법 굶구나
등 푸른 산맥이
검은 띠 두른 지 몇 날이 지났다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애절한 지평선 스멀스멀 속절없이 다가서네
배고픈 멧돼지 습생으로
도전하는 사람 사는 세상
한쪽에서는 흰 밥에 고깃국 타령이고
한쪽에서는 설원에 차량들만 북새통이네
대설에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철들은 곳에는 비가 내리고
철부지에는 눈이 내리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산 첩첩
물 겹겹 백두대간 동녘에는
대설에도 빗줄기 하염없이 내리네
우리가 빗줄기라면
이대로 진눈깨비로 내리면 안 되겠네
우리가 눈발이라면
대설에는 함박눈으로 내랴야 하겠네.
♧ 대설(大雪) - 엄원용
오늘은 대설
절기 따라 눈이 내린다.
온 마을과 마을
부드럽게 감싸며
토닥이며 덮어 내리는 눈
한여름 이글이글
지독하게 타오르던 욕망들이
한꺼번에 흰 치마폭 속에 포근히 잠재워
잠시 부끄러움 가릴 수 있겠다.
이제야 순수 하나쯤 품어볼 수 있겠다.
♧ 대설 -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 대설주의보 - 임영준
막힌 가슴
실마리도 없는
거친 땅
가뜩이나
거북한 일상을
철부지들이
좌지우지하는데
족히
몇 날쯤 덮어두는
눈 천지는 어떨까
민심도 천심도
잠시
순백이 되는
은근히 고대하는
대설주의보
♧ 大雪 - 편부경
널 처음 만난 건
간성 못미처 돌배가든 부근
신발끈 꽁꽁 동여매고
반짝이는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네
억새 혼자 냉가슴으로
미동도 않을 때
나무에 걸터앉아 날 바라본 건 너였네
그날 밤 넌
나보다 술이 세더라
새벽까지도 퍼부을 작정이었지
한 발짝도 허락지 않던 얼큰한 분노에
난 잠들 수도 없었네
비틀거리며 속초 지나 봉포 아야진에 갔었네
작은 배들 움츠리고 어깨를 떨던 사이로
네가 잠시 사라지고 난 아무래도 좋았네
백도를 돌아 나온 파도가 청간정 절벽에서 부서질 때
기억으로는 그쯤이었네
마지막이다
시작도 없을 거라며 우린 우리의 이름으로
숙박부를 기록했네 한가롭고 격렬하던 한 때
잠잠해진 어깨 너머로 바다가 육지로 오르는 걸
처음 보았네
마지막은 어디쯤일까 네 안에 갇힌
나의 네 안에
♧ 고백 - 홍수희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낮은 키 짐짓 발돋움하며
서릿발 허옇게 수염처럼 휘날리며
끝내는 오실 북풍(北風)의 잔기침 소리에
쫑긋 귀 기울이고 있는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매양 부드럽게 만은 오시지 않는 님을
달콤한 건 여로(旅路)의 길손에게 다 나눠주고
남은 거란 시린 손끝의 흰 수건 한 장
선물이라 발끝까지 덮어 주는 오직 한 분을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홍단풍 제 흥에 겨워 온몸을 발갛게 물들일 때도
그 그늘 곁에 오직 파란 잎새만 만지작이다
수줍게 꽃망울 숨기어 벙글고 있는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그 분 기어이 오시면
가시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뛰어서 건너
찬 서리 하얗게 쌓인 그 분 발등에
붉은 눈물 기쁘게 뚝뚝 떨구는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눈 내리는 하얀 산중에 무릎을 꿇고
그 분이 오시어 떠날 때까지
석류처럼 가슴을 열어 사루고 있는
애기동백을 보셨나요
그 가녀린 절개를 보시었나요
그 순결한 꽃자리를 보시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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