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한마음병원의 수선화

김창집 2011. 12. 7. 00:58

 

대장내시경 검사를 신청해 놓고 사전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가면서 아무케나 카메라를 들고 갔다.

진찰이 끝나고 과정 설명을 들은 뒤

한 보따리 챙겨주는 하제(下劑)를 들고 나오다가

바로 이 백의(白衣)의 천사를 만났다.

 

요마적 아침 마당에서 시인 정호승 선생이 나와

시를 설명하면서 들려준 ‘수선화에게’를 생각하며

약 봉지를 놓고 마구 셔터를 눌러댔다.

 

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느냐고

모두들 나름 참고 견디는 거라고

제목의 수선화는 수선화가 아니라

외로워 죽겠다는 친구의 이름 대신 붙인 거라고,

아니 외로워 자살하고픈 충동을 갖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라고.

 

  

 

♧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水仙花 - 강세화

 

가시내야, 꽃이 피었다

저승을 갔다가 되짚어 온 영혼이

싱둥싱둥 뛰면서 반가운 말도 다 못할

조고만 가시내야 너를 닮은 꽃이 피었다

잠잠히 어리는 기운이 말쑥하고 숫기없어

첫눈에 반하여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꿈처럼 피어나는 꽃잎에 그대로 담겨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또 변해있어도

내 맘 변하기 전에 너는 변하지 말아라고

샘물가에 빌어온 줄 알거나 모르거나

아주 판에 박은 듯이 너를 닮은 꽃이 피었다

속으로 아무도 몰래 그리움을 품은 가시내야

이 풍진 세상에 아직도 숫보기로 남아서

제시날로 낮은 그림자 꽃이 피었다

 

  

 

♧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 홍영철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지금은 지워진, 아니 희미해진

마음의 꽃밭 하나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결코 스스로 열리지 않는 낡은 창문 너머

내가 말하면

바다가 되었다가 강물이 되었다가

때로는 하늘로 열리는 오솔길이 되는

굳이 말하지 않고 바라보아도

슬픔이 되었다가 기쁨이 되었다가

상처를 감싸는 가슴도 되는

여기 아주 따뜻한 꽃밭 하나 있었어요

꽃밭 속에 노래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바람만으로도 배를 채우시던 어머니

햇빛만으로도 힘을 키우시던 아버지

그가 피워냈을까

지금은 없는, 아니 없을 수 없는

마음의 꽃밭가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 수선화(水仙花) 2 - 함윤수

 

슬픈 기억(記憶)을 간직한 수선화(水仙花)

싸늘한 애수(哀愁) 떠도는 적막(寂寞)한 침실

구원(久遠)의 요람(搖藍)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蒼白)한 무명지(無名指)를 장식(裝飾)한 진주(眞珠) 더욱 푸르고

영겁(永劫)의 고독(孤獨)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落葉)처럼 쌓이다

 

  

 

♧ 水仙花 -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宿醉)의 아침 거츠른 내 심사(心思)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寒風)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鬱鬱)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地核)의 깊은 동통(疼痛)을 가만이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

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우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人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야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ㅎ고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볓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였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이 왼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敬虔)한 경건한 손일네라

 

  

 

♧ 수선화 피는 날 - 민영

 

수선화 피는 날에는

마음이 가로등처럼 밝아온다.

여러 해 전에 부서진

마른 꽃 같은 시인 생각도나고,

임조 무렵 그 얼굴에 스쳤던

쓸쓸한 미소도 유리에 비친다.

 

휘몰아치는 포악한 광풍에

학교 밖으로 쫓겨난 시인은 끝내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소식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미친 바람 일으킨 자들이

또다시 활개치는 낮도깨비 세상에

긴 속눈썹 사이로 슬픔을 달래면서

수선화 피는 날만 기다리다

떠나간 시인.

 

- 황사 바람아, 그 미치광이들

아직도 숨통이 붙어 있느냐?

 

  

 

♧ 수선화 - 이재훈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 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으로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먼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행잎 흩어지는 날에  (0) 2011.12.09
대설에 핀 애기동백  (0) 2011.12.08
청미래덩굴 따뜻한 열매  (0) 2011.12.06
노로오름에서 만난 이끼  (0) 2011.12.05
백당나무와 겨울비  (0) 2011.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