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있을 때는 학교 건물 뒤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느지막이 물드는 것을 보고 계절의 흐름을 알았는데
지금은 집에서 200m쯤 떨어진 어느 집 울타리 안에
위로 길게 자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언제면 저게
물들어 사진을 찍나 기다렸지만, 급하게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서인지 영 시원치 않다. 며칠 동안 비가 오는 바람에
물이 덜 든 채로 추적추적 떨어져버려, 그 동안에 몇 컷
스케치 해둔 것을 내보낸다.
은행(銀杏)나무는 중국 원산인 은행나뭇과의 낙엽 교목으로
높이는 60m까지 자라며, 잎은 부채 모양으로 한군데서 여러
개가 난다. 암수딴그루로 5월에 꽃이 피는데, 암꽃은 녹색이고
수꽃은 연한 노란색이다. 열매는 핵과(核果)로 10월에 노랗게
익는데 ‘은행’이라고 한다. 목재는 조각, 가구 용재 따위에 쓰고,
관상용 또는 가로수로 재배한다.
♧ 은행나무도 한번은 운다 - 정군수
은행꽃은 은행나무의 눈물이다
가만 가만 숨죽이고 피었다가
몰래 몰래 내리는 꽃
이억 만 년 전부터
제 모습대로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살아온 나무
천녀의 가치를 뻗고
천년을 살면서
꼭 한번은 울어야 하는 어느 날
안쓰러운 눈물로
사람들의 발 아래로 내린다
그리운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고생대 순수의 눈물 그대로
사랑하는 이의
무릅 아래로 내린다
♧ 가을 은행나무 - 정진명
삶은 가끔 쉬어 가는 거라며
둥근 그늘을 떨구던
은행나무.
여름내 부풀어 올랐던 청춘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추락하는 삶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고
크고 노란 마침표를 찍는다.
점점이 찍어간 그 점,
내 마음속에도 하나 찍혀
말없음표 끝난 자리에서 둥근 달이 뜬다.
♧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 김현주
나무는 황금빛이었다
그 찬란한 빛이 지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나무는 잎을 떨구었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너 없이도 가을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너의 얼굴이 스쳤다
잠을 설친 내 아침은 늘 피곤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자판기 안으로 피곤을 구겨 넣듯이
동전을 밀어 넣었다
동전만 넣으면 새로 나오는 커피처럼
내 희망도 그렇게 쑥쑥 뽑아질 날이
있을 것인가
♧ 소공동 은행나무 - 趙司翼(조사익)
장맛비 그 빗물마저 외면하고
잎 마름으로 시름 거리더니
하나 둘,
기어코 열매는 가을을 보지도 못하고 떨어진다.
빌딩 숲에서
낮에는 햇살마저 외면당하고
밤에는 네온 빛 바다에 묻혀 잠들지 못하더니
아느냐!
풀색 초라한 너의 가지는
의족처럼 생명 인체 허영(虛榮)이며
가을이 온다 해도 사모(思慕)에 불과할 뿐
이미 초겨울 들판에서
빈들을 지키는 허수아비인 은행나무
가지마다 열매는 옹골지게 풍성한 듯 보여도
막차 떠난 시골 역에서
또 막차를 기다리는
나머지 시간에 불과할 뿐
너의 가을은 연모(戀慕)인 것을
♧ 기억의 은행나무 - 송연우
古佛고불이 두 친구와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그루가 한 뿌리 같은
한 핏줄 아름드리 삼형제 같은
고개 젖히고 우러러본다
늠름한 매무새
육백 살 묵은
미더운 어깨로
하늘 한 자락 우뚝 받쳐 들고 서 있다
화려한 일상 모두 버린
빈마음 한그루
깊은 말씀 한 절
노란잎의 쪽지에 적어 건네준다
덩치 큰 은행나무에 기대어 고단한 죽지 비비대니
그 나무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와
몸에 환하게 불을 켠다
♧ 은행나무 길 - 槿岩 유응교
누가
저토록
녹색의 변신을
찬란하게 보일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탐욕을 털어 버리고
의연히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처절한 추락을
황홀하게 수 놓을 수 있을까.
누가
저토록
진지한 삶의 의지를
하늘 끝까지 뻗어 갈 수 있을까.
♧ 은행나무 夫婦 - 김경윤
두륜산 진불암 들머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 다정하게 살지요
백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은행나무 부부는
여름이면 푸른 잎사귀 팔랑거려
이마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하얀 눈꽃 피워
더운 가슴 위에 살짝 얹어줍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어도
바람결에 서로의 마른 몸을 부벼주며
사랑으로 사는 늙은 은행나무 부부는
이따금 암자의 찻물 데우는 연기에도
지그시 눈을 감고 잔가지 파르르 떨며
묵언의 대화를 나눕니다
재재거리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화사한 꽃들도 얼굴을 숙이는 가을날이면
그 늙은 은행나무 부부는
제 생을 빛내던 수천의 황금 동전닢들
다 가난한 흙 속의 벌레들에게 주고
그예 풍장(風葬)의 주검처럼 앙상한 뼈로 서서
그저 겨울 햇살 한 줌에도 아미타불처럼 환하게 웃지요
♧ 은행나무 사랑 - 김금용
물밑 혼돈이 짙어질수록 황금빛으로
깊게 타오르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말을 아끼는 당신의 시선과
담 너머 마주 보고 선 또 하나
반 쪽 사랑을 향해
제 안에서 닳아진 엽록소 푸른 멍으로
명치 아래 숨겨둔 고통의 핵 하나
밤새도록 끌어올리는 당신의 노동을
오래도록 멈춰 서서 지켜봅니다
차갑게 굳어 가는 어둠의 중심, 그 한가운데
아직 촛불 한 가닥 남아
손사래 치며 사라지는 계절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밤길 밝혀주는 별이 된다는 것을,
몇 점 희망 간직하는 사람들
꿈속으로 불 밝히며 스며든다는 것을,
비어가는 늦가을 숲에 여전히 자리 지키고 선
당신의 숨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까무룩하게 기울어져가는 11월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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