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상난동을 부릴 때면
가끔 오름 꼭대기에 철쭉이 피어 철없이 굴지만
지금 꽃집 안은 화분에 심어 출하를 기다리는
철쭉과 여러 봄꽃이 가득하다.
딴 때 같으면 3월 중순에 하나둘 보이던
벚꽃도 금년엔 하나도 볼 수가 없고
가는 곳마다 매화가 넘쳐난다.
그래도 우수, 경칩 지나 춘분이라고
계단에 놓인 철쭉꽃이 화사하다.
♧ 봄이 오는 소리 - 박인걸
찬바람 사이로 비친 햇살이
물오른 가지를 쬐일 때
움츠린 진달래 꽃 봉오리에서
실핏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발이 더러 날리는
춘분으로 가는 길목에
뒤뜰 감나무 가지서
되새 한 쌍이 짝짓는 소리가 들린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묵은 낙엽더미를 헤집고
바스락 바스락 거리며
맑은 얼굴을 내민다.
봄은 이렇게
가녀린 소리로 오지만
생명들의 찬가는
곧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 춘분(242) - 손정모
아무래도 그건
기나긴 여정이었어라
추위로 멍울진 상처엔
호수를 지나
강, 밤새워 건너던
새떼들의 함성이 얼룩지고
식물의 물관부를 거쳐
끝없이 치솟던 물기마저
화석의 색채로 침묵하다가
마침내 밤낮의 길이
합일점에 이르러
살며시 홍조를 띠는
오늘을 본다.
♧ 춘분(春分) 앞날 - 金在欣(김재흔)
꽃은 시들면 열매로 남는다는
당연한 진실을 달래면서도
여름이 가는 것이
왜 이리 서운하당가.
내 가슴을 터지게 하던
봄을 먼 발치로 보내면서
열심히 피어난 녹두꽃은
왜 저리 시들고만 있당가.
차라리 꿈결처럼 보이는
높아가는 푸른 하늘 저 멀리
한 점 구름으로 훨훨 날고파도
왜 이리 가슴은 무겁기만 하당가.
서투른 인정을 베풀기 위해
몇 방울의 눈물을 떨구고는
뒤안길에 숨어버린 여름을
어쩌자고 이리 서운해 한당가.
머물고 싶은 한 시절을
고운 얼굴로 흐느끼면서
과물들이 그 꼭지를 내릴 때
왜 이리 썰렁하당가.
고복수의 짝사랑에 나오는
슬피 우는 으악새가 떠오르는 것은
또 어쩐 일이랑가
또 어쩐 일이랑가.
♧ 春分 날에 - 최홍윤
잔뜩 화가 났던 바다가
오늘은 능청스럽게도 잔잔하네
정동진 산모퉁이 돌아서는 기적소리
기적소리에,
날밤도 두부모같이 둘로 쪼개지고
동삼 내내 앓던
내 고뿔도 선선히 빠져나가고
내 가슴에 잊힌 그리움만
봄바다의 파래같이 돋아나네
정동진 들어오는 기차에는
하얀 미소에 긴 머리 소녀가 타고 올 것만 같아
불현듯 도지는 내 그리움,
묵은 그리움을, 파도에 떠밀리는 모래알처럼
헹구고 또 헹구어도 새살은 돋아나고
고울사 고울사 봄비 가신 후에
배 한 점도 보이질 않는 춘분날에
쪽빛 바다에는 비로소 봄이 왔네
봄날이 왔네!
♧ 춘분(春分) 아침에 - 양해선
수월한 가변차로 먼저 차지하고
틈만 나면 샛길로 빠져 나와
숨 가쁘게 달려온 길,
낮과 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오늘 하루만큼은
앞서가고픈 욕망 내려놓고
골 따라 바람처럼
강 따라 물처럼
부는 듯 흐르는 듯 가려는데
멈춰선 길 위엔 끈적끈적한 안개
다가와 덮친다 침침한 동굴은
더더욱 깊어만 가고
갓 길을 달려온 몇몇 자동차들
막힌 길은 요렇게 달리라는 듯,
요즘 세상 사는 법 보라는 듯,
고개 내밀고 낄낄거리며
앞질러 내달린다
주춤거림은 길게 늘어서고
한껏 부추겨진 조급증
겨우 다독여 놓은 다짐을 밀치고
급하게 옆으로 꺾는다
비상등 불빛 속에 얼굴을 숨기고
경적을 울려대며
그들보다 더 빠르게 질주한다
뒤돌아보니
오늘도, 지나온 날들처럼
다시 기울어진 채
뿌연 안개 속에 묻히고 있다
♧ 비탈과 골짜기 사이 - 이정란
경칩과 청명 사이
춘분이다
햇살의 입자는 가늘게 세포분열하고
바람은 날개 밑에 숨겼던 칼을 버렸다
자전거 타고 둑길을 달리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연인에게 전화를 건다
초롱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새싹들
개울 양쪽을 이으려는 다리
사랑의 말은 마음 어디까지 스며들며
땅 속의 생기는 새싹 다리 놓아
무슨 꽃을 퍼뜨리려나
다리는 잇는 게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일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대 향해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춘분이다
살의 비탈과 영혼의 골짜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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