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아이성 선미박물관에 들렀다.
세계적으로 ‘밀라이 학살’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베트남전 최대의 민간인 학살을, 베트남 사람들은
지역 이름을 따 ‘선미(Son My) 학살’로 부른다.
1968년 3월 16일에 발생한 이 사건은
504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낳았고,
그중에는 어린이, 노인, 임산부가 포함되었다.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한 용기 있는 헬기 조종사가
학살을 제지해 소수의 주민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사건은 계획적으로 은폐되었는데
진실은 1년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건은 베트남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찰리중대 1소대의 켈리 중위는
109명을 학살한 혐의로 무기징역과 강제노동 판결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감형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74년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 종군기자 론 해벌이 촬영한 사진들은
밀라이 학살의 은폐된 진실을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검열에 걸릴까봐 필름을 반씩 잘라 감춤으로써
검열을 피해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다.
그 때 살아남은 분이 지금은 박물관장이 되어 있지만
미군은 어떻게 그 많은 죄를 짓고 그냥 넘어갈 생각을 했을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무가 알고 있는데
손바닥으로 해를 어떻게 가릴 수 있단 말인가.
뒤늦게 참회한 미국인들은
학살 날짜를 계기로 열리는
위령제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
이 야자수는 그 박물관 경내에서 찍었다.
이 중에는 당시 학살 현장을 지켜 본 나무도
총알을 몸에 지닌 채 살아 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이 비슷한 형태로 행한 학살 현장이 있는데,
그곳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다.
언제면 우리도 그 영혼들을 위무하러 갈까?
♧ 어둠 · 시계 조립하시는 아버지 - 이정란
아버지 방에는 버려진 걸 주워다 조립한 시계
여덟 개가 걸려 있다
열어 보이시는 BYC 메리야스 상자 안에
할 일 없는 부속품들이
젊은 시절 사귄 여자들만큼 있다
죽어 있던 바늘이 시간의 주둥이에 입맞춤할 때
부스스 녹만 떨어뜨리는 뻰찌 같은 추억의 빛깔이
재생되기를 바라시는 걸까
이생의 아름다움을 호르르 마셔 버린
시간의 식탐이 두려워
가까이 붙잡아 두시려는 걸까
아버지의 전성기는 베트남 다낭에서
오른손가락 네 개와 함께 잘려 나갔다
젓가락과 펜, 드라이버가
온전한 엄지손가락과 잘린 손가락 뿌리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여질 때까지의 아버지 아픔을 난 잘 모른다
상자 안에 바늘이
어떤 시계의 경혈에 꽂혀
시간의 결을 쓰다듬을지 모르듯
대한 노인회 노인정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등허리에 바늘 없는 시계가 걸려 있다
버린 적 없지만 버려진 그 시계를 살려낼 바늘을
아버진 찾으시려는 걸까
♧ 배앓이 - 배정웅
한 사나흘간 배앓이를 몹시 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출구로 빠져나갔다
내 젊은 날의 베트남 고엽제나
무분별한 음주가 원인 근인인 것 같다.
기진한 눈앞에 저승의 하데스가 이상한 모자를 쓰고
어른어른거렸으니까
이렇듯 내 속에도 한 사나흘 천둥번개가 치고
이승의 홍수가 아열대로 일어
집짐승이며 잡다한 세간살이며
세찬 물살에 모두 둥둥 떠내려갔다.
그 한바탕의 물난리로
내 안은 삐리이강의 沙土로 비워졌지만
급류에 떠내려가다 가다
수초나 마른 풀대에 매달려
애처롭구나
허우적 허우적대며
보이지 않는 전능한 손 하나
마음에 다급히 놓아보는 내 존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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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데스: 지옥을 관장하는 신 (그리스 신화)
* 삐라이강(piray강): 남미 볼리비아에 있는 강
♧ 반레 - 김준태
반레 시인이 망월동 김남주 묘에 와서 운다
1980년 5월 라디오로 김남주 시를 들었다면서
세 번 절하고 또 세 번 무릎 꿇어 절을 올린다
한때는 베트콩 전사, 입대동기 300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를 포함해 5명뿐이었다는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향불을 피우며 마냥 운다
자기나라도 아닌 옛 따이한 적국(敵國)에 와서
한 송이가 아닌 다섯 송이 꽃을 묘 앞에 놓고
향도 다섯 개 피워놓으며 눈물 그렁그렁 운다
1960년대 그 시절 나와 총칼을 마주 겨눈 반레
우연히 동갑이란 사실을 안 후 서로 부둥켜안고
아! 먼 고향 친구인 듯 심장의 맥박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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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레 : 1948년 2월 베트남 하노이 근교 아름다운 닌빈 마을에서 태어나 10년 이상을 월맹군 정규군과 베트콩(NLF)으로 전투에 투신하고, 이어 중국과의 전쟁, 폴포트 치하 캄보디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영화감독을 하면서도 시와 소설을 열정적으로 쓰는 베트남 최고의 시인인 그의 본명은 레지투이다. 반레란 이름은 시인이 되기를 꿈꾸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전우 이름인데 그는 아예 필명과 본명마저 ‘반레’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 등 소설을 펴낸 그는 2003년 10월 한국방문 기간 중에 광주 망월동 5·18묘지도 찾았다.
♧ 야자수 - 유일하
야자수가지 끝에
초연한 내 마음 걸고
아픔도 묻어둔 체
고즈넉하게 매달리어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들의 낙원이 펼쳐진 곳
극과극의 조화를
고고히 휘저어본다
열매 영글어가듯
너처럼 누렇게 변하면
네 목을 뚫고 빨대로
서서히 맛보리라
인생의 맛을
아! 비리다
♧ 휴틴의 시, 겨울편지를 읽다 - 김태수
당신은 모두 용서했다고
베트남민족해방군 대령이었던 *휴틴이여
우리들 얄팍한 입술을 거친 한 줄 가벼운 언어로
화해를 구하다니 너무 염치없는 일임을 안다
30여 년 전 처절한 그 전장(戰場), 눈뜨고 죽은 당신 전사들의
벗은 알몸들 흑백사진 가득했던 지하 벙커 내 서랍 속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 전투 서열병
그나마 시인이어서 가슴이 저릴까
우리들을 향하여 계속하여 잔을 들고 *‘목짬펀짬’
‘목짬펀짬’ 외치던 그 너그러운 서울의 밤을
동지나해의 바다가 만든 푸른 파도
하염없이 백사장에 스러지던 닌호아읍 동하이 해변
그 착한 마을 이름 속에서도 전쟁이 있었던가 전쟁은
가시나무들뿐이었던 *쑤이까이 망망계곡
대낮에도 어김없이 귀신 울음 습지에 내리고
어차피 당신과 나는 적이었다 가슴이 없었던 시절
하늘 까마득히 찢긴 팔다리들이 솟구치고
누이혼바, 누이혼헤오, *누이다반
누이라는 한국어로 아름답던 산골에서
가슴팍을 겨누었던 총구들, 서로가 동양인임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오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우리들은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끄러울 수밖에
당신과 잔 높이 치켜들고 ‘목짬펀짬’ 그 서울의 밤부터
휴틴이여, 지금 돌아와 누운 내 집에서도
*‘여기 얇은 이불 곁에 하얀 눈
점심 짓는 장작불이 붉어도 산은 여전히 흐리고
제 몸 속에 얼음으로 갇혔던 잉크
바알간 숯불에 녹이니 절로 편지가 되었네
…….
쌀은 늘상 일찍 올라오고 편지는 더디 오네
밤새 라디오를 틀어 텅 빈 참호의 고독을 달래네
수년간 여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해
말발굽 소리 네 구두 굽 소리처럼 들리네’
나는 슬프다 당신은 어떤가
어눌한 한 줄 따이한의 고백에도 환히 웃거나
짧은 엄지손가락 높이 들어 흔들었지만
가슴의 상처 깊어 쉬 아물지 않을 것임을 안다
당신이 ‘목짬펀짬’ 잔을 부딪던 그 서울의 밤
우리들은 더 큰 소리로 ‘목짬펀짬’ 잔을 치켜들었지만
‘내게 쓰는 편지에 먹물 자욱 번지고
성긴 격자문 사이 찬서리 하냥 들이치네’
휴틴이여, 더 더 큰 소리로 당신의 시 ‘겨울편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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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 작가동맹 총서기로 2002년 10월 24일에서 10월 30일 까지 제8회 ‘세계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함
2) 단숨에 잔을 비우자는 ‘원샷’에 해당하는 베트남어
3) 월남 중부 지방의 계곡 이름, 파월 백마사단 제28연대의 작전지역이었음
4) 파월 백마사단 제29연대의 작전 지역에 위치한 산 이름. 누이라는 말은 산을 의미함
5) 휴틴의 시 ‘겨울편지’ 중에서, 그는 이시로 베트남 작가동맹 시인상을 수상
♧ 묻는다 - 휴틴
땅에게 묻는다: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존경하지.
물에게 묻는다: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채워주지
풀에게 묻는다: 풀은 풀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짜여들며 지평선을 만들지
사람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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