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와 애기범부채

김창집 2014. 7. 16. 14:42

 

애기범부채가 피어

길섶을 빨갛게 태우고 있다.

장맛비 사이사이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을 자랑한다.

 

저 녀석들은 이미

불의 신의 저주에

그것도 한여름에 몸을 사루며

피워야 하는 것은 아닐지?

 

읽다가 한쪽에 넣어 두어 잠시 잊었던

‘우리詩’ 5월호의 시와 함께 보낸다.

 

 

♧ 언니들 - 김경애

 

언니, 하고 부르면 행복한 날 있지

마치 죽은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것처럼

몰래 만나는 애인처럼 언니가 좋지

주변의 많은 언니, 언니들…….

여자들끼리 있을 때 언니들은 수다가 넘치지

언니는 말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갖고 있지

풀리지 않는 생각들이 꼬이면

꼬이고 꼬인 생각들을 푸느라 밤을 설치지

소문들은 몽글몽글 연기처럼 피어나고

밤새 미궁 속 주인공들을 만드는 마녀같은 언니들

해가 뜨기 전에 어딘가로 전화를 걸지

한낮이 되도록 풀리지 않는 의문들

뱀 같은 머리카락으로 온 몸을 칭칭 감기도 하지

쉿, 마녀 같은 언니를 만날 때는 절대로 입조심해야지

함부로 접선놀이에 말려들었다가는

혓바닥 가시에 찔릴지도 몰라

맞장구를 쳤다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

널뛰기하다가 바로 아웃!

당하는 저 언니들을 좀 봐! 

 

 

♧ 나는 오늘 - 박원혜

 

너를 향하여 악마라고 소리쳤다

내가 시방 악마의 상태다

너를 향하여 돌팔이라고

소리쳤다

시방 내가 돌팔이다

손을 씻으며 알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죽은자의 검은 얼굴이라는 것을

오늘 또다시 나는 악마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

악마의 습격에같이 널뛴다

오늘 나는 온종일을 나란히

악마와 동행했다 

 

 

♧ 큰일났다 - 임채우

 

아내가 하늘나라로 떠난 날은

온 세상 마른 눈물

버들개지 솜털이 폴폴 날리던 날

누구 하나 축나도 티 하나 없던 날

 

오늘은

세상의 검은 상복 갈아입고

번개 치고

뇌성이 우짖더니

밤새 폭우가 쏟아진다

 

그래,

정말 큰일났다 

 

 

♧ 고흐 곁을 떠나는 사람들 - 이생진

 

고흐에겐 떠나는 사람들뿐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그 틈에 끼어 고흐도 돌아오지 않는다

 

고흐가 면도로 귀를 잘라

창녀 라셸에게 주고 난 뒤

고갱이 머리를 흔들며 고흐를 떠나고

테오가 눈물을 닦으며 형을 떠나고

시냐크가 우정 어린 손을 흔들며 떠나고

술친구 룰랭이 아내 오귀스틴과 떠나고

경찰이 노란집에 못을 박아

다시는 고흐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던 아를 마을

마지막으로 떠나지 말아야 할 압생트도 떠난다

 

고독이 고흐를 끌고 병원으로 들어왔을 때

고흐에게 남은 것은 빈 항아리

고독이 부들부들 떨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발작 속에서 분열되는 환청과 환시에

뿌리치는 케가 보이고

흐느끼는 ‘슬픔’의 시엔이 보이고

옹알거리는 빌렘의 유모차가 보이다가

칼을 들고 대드는 괴물에 쫓겨

비명을 지르며 깨어보면

창문에 비친 커다란 정원수

화필을 들어 그리다 지친 눈에

아아 ‘별이 빛나는 밤’ *

떠난 것들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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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 자화상 - 정희성

 

어느 천재 시인이 일필휘지로

하루저녁에 휘갈겨 쓴 시집 한 권을

읽고 읽고 또 소리 내 읽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석 달 열흘이 걸려서야 다 읽었다

이 귀신이 필경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겠지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

 

 

♧ 명퇴이후 2 - 권혁수

 

그 여자가 이별을 통보해 왔다

회사에서 또 명퇴를 통보 받은 기분이다

이제 그 여자가 없는 거리를 걸어야한다

그 여자가 타지 않은 버스를 타고

그 여자가 버린 기억을 더듬어 기억해야 한다

그 여자는 이별 저 건너 그늘진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정표는 있으나 건널 다리가 없는

유일한 풍향계는 그 여자가 남긴 미소뿐.

그 여자의 미소가 지워진 향수처럼

가슴이 굳은 바위처럼 밤이 오면

나는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여자가 없는 꿈은 꿈이 아니다!

그 거리를 걷지 않고 버스도 타지 않고

얼굴이 얼룩진 거울도 보지 않고

향수를 상실한 기억이 기억이 아니듯!

마침표 없는 노래가 거리의 가로수를 흔든다

가로수처럼 거리에서 나는 매일 그 여자와 이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