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권경업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김창집 2014. 10. 31. 00:37

 

가을비가 온다길래

무슨, 했는데

진짜로 유리창에 칙칙 떨어지네요.

 

이 비는 금요일을 넘어

토요일까지 내린다 하니,

 

모처럼 지난 주에 강의가 끝난

우리 오름 8기를 데리고

단풍 보러 가기로 했는데

걱정이네요.

 

하기야 하늘이 막는 일,

비가오면 삼겹살 궈 먹으러 가자 해두었는데 

어떤 걸 상상하는지 모르겠네.

 

산 가까운데 있는 빈집에

모든 걸 준비하고 가서

소풍간 기분으로 궈먹으며 놀려했는데.

 

하긴 준비가 안 되고 비가 많이 내리면

어디 가시리 '자연사랑'이나 가서

사진 구경하고 나서

거기 고기집에서 한바탕 궈먹고 오지 뭐.

 

문득 권경업 시인의 가을비가 생각 나

보내 준 시집 '꽃을 피운 사랑의 독백'을 펴놓고

이렇게 올리고 있나니….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 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의

배경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 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 풍경 속 여백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랑아

아! 억새꽃 한 아름 같은 사랑아

   

 

♧ 가을비 1

 

온다는 소식 듣고

오후 내내 설레었어요

 

왜 이리 눈물이 솟을까요

제 어깨를 감싸 주세요

 

아무 말씀 않으셔도 좋아요

우리 어디든 걸어가요

 

노각나무 잎 지는 쑥밭재를 넘어도 좋고

유평리 주막거리라도 좋아요

 

오늘은 바들바들 떨면서

당신의 체온으로 흠뻑 젖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죄송해요

드리려던 안개꽃이 다 시들었어요

   

 

♧ 가을비 2

 

장당골, 가느다란 가을비

잠깐이지만

속속들이 깊게 젖는

 

언젠가 소리 없이

앙가슴 적시고 간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습니다

   

 

♧ 가을비 3

 

치밭목 자작숲처럼, 훌훌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가슴 젖어, 묵었던 해소기침

도지더라도

   

 

♧ 가을비 4

 

만나고 오는 날은, 서늘하여

가슴에 모닥불이 지펴집니다

 

매운 연기에, 가끔 눈물도 지우며

   

 

♧ 가을비 5

 

발소리도 가만히 오시는 날은

함께 걷는 것 그리 좋아해

오솔길은, 어슬렁어슬렁

바쁠 것 없이

갈참나무 사이로 자작숲으로

장당골 개울 건너 잡목숲으로

짐짓 질러갈 곳도 에돌아

이리저리, 저물녘까지

가냘픈 몸매를 같이합니다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이승의 소중한, 한 사랑이여

우리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고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전형의 시와 개모밀덩굴  (0) 2014.11.06
사람주나뭇잎과 가을 시편  (0) 2014.11.03
노로오름의 단풍  (0) 2014.10.27
섬 바람이 분다, 소리왓 공연  (0) 2014.10.26
한라구절초의 순결  (0) 201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