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온다길래
무슨, 했는데
진짜로 유리창에 칙칙 떨어지네요.
이 비는 금요일을 넘어
토요일까지 내린다 하니,
모처럼 지난 주에 강의가 끝난
우리 오름 8기를 데리고
단풍 보러 가기로 했는데
걱정이네요.
하기야 하늘이 막는 일,
비가오면 삼겹살 궈 먹으러 가자 해두었는데
어떤 걸 상상하는지 모르겠네.
산 가까운데 있는 빈집에
모든 걸 준비하고 가서
소풍간 기분으로 궈먹으며 놀려했는데.
하긴 준비가 안 되고 비가 많이 내리면
어디 가시리 '자연사랑'이나 가서
사진 구경하고 나서
거기 고기집에서 한바탕 궈먹고 오지 뭐.
문득 권경업 시인의 가을비가 생각 나
보내 준 시집 '꽃을 피운 사랑의 독백'을 펴놓고
이렇게 올리고 있나니….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 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의
배경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 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 풍경 속 여백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랑아
아! 억새꽃 한 아름 같은 사랑아
♧ 가을비 1
온다는 소식 듣고
오후 내내 설레었어요
왜 이리 눈물이 솟을까요
제 어깨를 감싸 주세요
아무 말씀 않으셔도 좋아요
우리 어디든 걸어가요
노각나무 잎 지는 쑥밭재를 넘어도 좋고
유평리 주막거리라도 좋아요
오늘은 바들바들 떨면서
당신의 체온으로 흠뻑 젖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죄송해요
드리려던 안개꽃이 다 시들었어요
♧ 가을비 2
장당골, 가느다란 가을비
잠깐이지만
속속들이 깊게 젖는
언젠가 소리 없이
앙가슴 적시고 간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습니다
♧ 가을비 3
치밭목 자작숲처럼, 훌훌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가슴 젖어, 묵었던 해소기침
도지더라도
♧ 가을비 4
만나고 오는 날은, 서늘하여
가슴에 모닥불이 지펴집니다
매운 연기에, 가끔 눈물도 지우며
♧ 가을비 5
발소리도 가만히 오시는 날은
함께 걷는 것 그리 좋아해
오솔길은, 어슬렁어슬렁
바쁠 것 없이
갈참나무 사이로 자작숲으로
장당골 개울 건너 잡목숲으로
짐짓 질러갈 곳도 에돌아
이리저리, 저물녘까지
가냘픈 몸매를 같이합니다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이승의 소중한, 한 사랑이여
우리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고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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