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우리詩’ 5월호의 시와 금낭화

김창집 2015. 5. 16. 23:50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5월호의 시를

금낭화와 같이 다시 몇 편 내보낸다.

 

금낭화(錦囊花)는 양귀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40~50cm 정도이며,

온몸은 흰빛이 도는 녹색이고 줄기는 곧게 선다.

꽃은 총상 꽃차례로 줄기 끝에 달린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설악산 지역에 분포한다.

 

 

♧ 시인 - 홍해리

   - 치매행致梅行 · 120

 

아파 봤니, 아파 봤어

아내는 아픈 것도 모르고

순진한 얼굴 가득

무구한 웃음을 피우는데

그걸 보고 시 쓴답시고

끼적대고

끼적거리다니

죽일 놈

제가 시를 쓴다고

시인이라고

시가 약이냐

시가 아픈 것 낫게 해 주냐

병 고쳐 주냐

죽일 놈!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용장사지 가는 길 - 백무산

 

경주 남산 용장사지 가는 길

처음 갔을 땐

어둑한 길을 짐작 하나 앞세우고 지도도 없이 찾아갔다

 

두 번째부터는

못미처 계곡에서 꺾었거나 지나쳐서 모퉁이를 돌았거나

걸음이 남았거나 숨이 모자라서 헤매다 그냥 왔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더운 피가 앞선 대로 따라간 처음 사랑은 눈물도 이별도 황홀했다

이리저리 굴려본 사랑은 넘치거나 못 미쳤다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즈음에는 이미

길은 길이 아니라 통로에 불과했다

길을 가고 길을 잊어야 못 본 첫길이 두근거리며 열린다

종일 듣는 바람소리 처음 듣는 소리다

 

 

♧ 아내의 밥상 - 김지태

 

출장지에서 앞당겨 집에 왔더니

아내 혼자 밥을 먹고 있다

놀라 얼른 감춘 밥상 위

맨밥에 달랑 김치 몇 조각

어머, 예고도 없이 벌써 왔어요

당신이 없으면

반찬 걱정을 안 해 대충 먹어요

김칫국물이 해일처럼

와락 내 허파로 쏟아지는 저녁

 

 

♧ 강문(江門)에 들다 - 김경미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그 곳에 가지 마라

침향을 묻듯 그대 이름을 묻으며

결코 나는 등 돌리지 않았다

 

골 깊은 심연의 소리가 종종 빗물로 내려앉던

저 바다에서 나는 연잎처럼 떠다니고

꽃을 피울 정갈함을 찾아 물속에 뿌리 내리며

푸른 눈매를 가진 그늘 속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가 되고

발을 담그는 새가 되기도 했다

 

늪이 아니면서 늪이었던 것처럼

한 생에서 한 번도 또 다른 생을 주어보지 못한 아픔에

오랜 통곡도 용서가 되는 젖은 땅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그 곳에 가지마라

침향을 묻듯 그대와 나를 묻으며

결코 나는 발밑을 보지 않았다

   

 

♧ 5월에 부치는 편지 - 김정화

 

어느새 장미 피었다

 

잃어버린 꿈을 찾으며 간간이

안개 낀 도시의 어깨 위의

전설처럼 떠도는 꽃가루 떼

 

가까운 듯 멀리 있는 산을 보며

꽃가루 날리는 날엔

한 줌 그리움도 소중하여

나는 유리창 안에 들어 편지를 쓴다

 

봄을 밀치고

맨발로 서 기다리겠다고

성큼 다가서는 이름에

장밋빛 흔적을 남기고

 

젖은 나무를 태우듯

젖은 나무를 태우듯

 

한때 걸었던 꽃길은

꽃길로도 지워져

잡초 무성하더라고

 

먼 듯 가까이 있는 산을 보며

나는 나에게 갇혀 편지를 쓴다.

   

 

♧ 청동 숟가락 - 조경진

 

청동 숟가락에서

빙하가 출렁인다

아득한 골짜기 따라 흐르다 구비친

자갈 언덕 너머 족장의 집

빙하를 견디고 있다

움막 안에 피워 논 불이

한 끼니를 데우고

숟가락이 제 몫 하는 늦은 저녁

족장이 든 숟가락에

수천 년 세월이 드나든다

 

해일에 밀려온 뿔고둥의

조용한 한숨처럼

주인 놓치고 박물관 유리상자에 갇힌

청동 숟가락

드디어 먹성 좋은 사내 입도

숟가락에 갇힌다

입술에 바람 일고 전율하는 큰 입

신음을 퍼 나르던 끈적이는 슬픔

세월은 해풍에 실려 자꾸 밀려나고

덩그러니 남은 청동 숟갈 하나

말 없는 말은 늘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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