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보리 익어가는 계절

김창집 2015. 5. 19. 23:13

 

오늘 한림읍 명월리에

촬영 오가면서 본 보리밭….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가

너무도 보기 좋았고

추억에 잠기게 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왜 그리 못 살았던지

보릿고개 넘기려고

별별 걸 다 먹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때는

밭마다 보리를 갈아

보리가 익을 때면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빛났었다.

 

아, 그 중에 식구 많은 우리집

어떻게 보리를 많이 갈았던지

새 든 밭에 보리를 다 베고 묶어

몇 밭 거리 등짐으로 져 나르고 나면

온 몸에 까끄라기 동강이 가득했다.

 

그래도 게역(미숫가루) 먹을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었다.

그 때까지는

마차에 실어다 낱가리를 만들어 눌었다가

틀에서 훑고, 맥타기에서 장만해서

멍석에 널어 볕에다 말리고 솥뚜껑에서 볶아

방애공장(정미소)에서 소금과 사카린 넣고

갈아 와야 했다.

 

그걸 물에 타서 시원하게 들이키는 맛

보리밥에 버므려 먹고

아니면 종이에 싸서 돌아다니며 군것질 하듯 먹는 맛

어떻게 먹어도 맛이 있었다.

   

 

♧ 보리밭. 2 - 김영천

 

보리누름이 한참이다

갯바람들이 그 위로 수런거리며 지나가긴 하지만

쉬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더러 함부로 쓰러진 곳이 있다

갑자기 길을 잃은 바람이 한동안

머뭇거리었던 것일까

깜부기 입에 탈탈 털어넣어도 보고

삘릴릴리 삘릴릴리 보리피리도 불어보고

그렇게 한참이나 누웠다 갔을까

밭둑으로 푸르게 돋은 잡풀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바람의 길을 연다

후적후적 걸어나오니

 

그러면 내 한 평생이 바람인가?

 

 

♧ 불면의 보리밭 - 김학산

 

지난 내 젊음은 긴 불면의 보리밭이었다

소금물에 피물집 터진 쓰라린 한겨울의 섬마을

노고지리를 통증처럼 뱉어 길을 내는 하늘가

구름의 무딘 펜촉이 물안개를 그릴 즈음

보리밭에 동그마니 앉아 한 땀 한 땀 초록의 수를

놓아가며 서리서리 파란 실핏줄을 지문처럼

심고 있는 여인이 있다

울 어매가 있다

바람이 풋 살 벗는 소리 사각사각 들리고

황금빛 보리모가지 사이사이 세월의 켜켜한

지층에 쌓인 향긋한 어머니의 젖 내음은

차라리 기록할 수 없는 신화였네

그 해 아버지의 배는 귀향하지 않고

영원한 그리움의 안쪽으로 회기하였고

헐거운 날개 밑 열 세끼들마저 뭍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 이제는

그 어떤 기쁨과 슬픔의 질량도 갖지 못한

깃털처럼 가벼운 울 어매여

오늘도 한낮 마늘쪽 같은 초승달로 둥둥 떠

하늘 가슴 그어 가며 온갖 그리움의 묵정밭만

일구시고 일구시고

늙은 고래의 음성으로

바다로 바다로만 향하여 우우………….

당신은, 내 삶의 지분 위에 새겨진

영원한 미개인

나는 당신의 뼛속 깊이 든 이명의

몹쓸 바닷바람 소리

   

 

♧ 유월엔 보리바람 슬프다 - 이영균

 

노곤한 유월의 긴 햇살

봄꽃을 분주히 다 보내고

밭보리 익어가는 소리 평온하다

 

바람 누런 보리밭 가는 길

논두렁 뚝 찍어 끝나는 곳엔

찔레꽃 소담한 소솔길이 있다

 

뻐꾸기 푸르도록 울음 길고

아카시아 향기 자옥한

길게 쏟아진 햇빛의 비명 깊은 숲

 

찔레가시 찔린 손으로 꽃 쥐어주던

그날이후 햇살이 긴 유월엔

누렇게 불어오는 보리바람이 슬프다.

   

 

♧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던 날 - 해운 고형섭

 

마량항을 한 눈에 휘감은

북산 해송옆 밭두렁엔

올 해도 쉬임없이 쌀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저만치 완도를 돌아 사초리에서

샛바람이 먹구름과 함께

시원스레 몰려와 보릿결에 닿으니

첫사랑 긴 머리처럼 쏴아 감겨 휘몰아간다

 

지금은 요코하마 빌딩숲에서

부산바다, 고향 노루목을 마음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나의 첫사랑은

라이너마리아릴케 오월의 시에서처럼

아카시아 향과 함께

청초한 하얀색이 베이지색으로 변해가고 있으리

 

아!

보리밭을 가로질러 한가운데 눕고 싶다

파아란 하늘이 보고 싶다

첫사랑 그녀의 긴 머릿결에 감겨

두륜산에 노을이 넘어갈 때까지 누워 있고 싶다

 

고금도를 향해 뻗어 있는 붉은 다리가

훤히 보이는 나의 하얀 별장 굴뚝에선

흰 김이 뭉실 뭉실 피어 오르고

나의 첫사랑이 가냘픈 손을 저어 손짓한다

 

밥상엔 10분도 쌀보리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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