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은 제주 목관아지에서 열린
제주문학의 집 주최
시락시락(市樂詩樂) 문학콘서트에 다녀왔다
이번 행사에는 요즘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시인 안도현과 인기 시인 김소연, 그리고 탁현민 교수가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방청석의 질문까지 수용하며
문학과 독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가수 윤영배와 김대익,
헤비메탈 그룹 비니모터 등
제주에서 활동 중이거나,
제주와 인연을 가진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봄밤의 정취를 자아내었다.
이 날 참가했던
안도현, 김소연의 시 몇 편을 골라
오늘 산행 중 많이 만났던
박새꽃과 함께 올린다.
♧ 나무생각 - 안도현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위에 點點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外邊山외변산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 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 나무 - 안도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 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좋을 것을
죽은 듯이 쓰러져 이미 몸 한쪽이 썩어가고 있다는 듯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라는 듯이 코를 쳐박고
엎드려 있어도 될 것을 나무는
한사코 서서 나무는 버틴다
체제에 맞서 제일 잘 버티는 놈이
제일 먼저 눈 밖에 나는 것
그리하여 나무는
결국은 전 생애를 톱날의 아구같은 이빨에 맡기고 마는데
여기서 나무의 생은 끝장났다네, 저도 별수 없지 하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끌려가면서도 나무는 버틴다
버텼기 때문에 나무는 저를 싣고 가는 트럭보다 길다
제재소에서 토막토막으로 잘리면서 나무는
텡구르르르 나뒹굴며
이제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 한다
나무는 버틴다
♧ 강과 연어와 물푸레나무의 관계 - 안도현
남대천 상류 물푸레나무 속에는
연어 떼가 나무를 타고
철버덩거리며 거슬러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알을 낳으려고
연어는 알을 낳은 뒤에 죽으려고
죽은 뒤에는 이듬해 봄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수천 개 연초록 이파리의 눈을 매달려고
연어는 떼 지어 나무를 타고 오른다
나뭇가지가 강줄기를 빼닮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마흔 살 - 김미연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늙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대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 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왼 손바닥이 가슴에 얹히고
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
눈물로 나를 세례하곤 했다
자동우산을 펼쳐 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
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
하얀 타일 위에다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시 한 줄을 적어본다
네모진 타일 속에는
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 길을 항해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방주를 띄우게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평생토록 새겨 왔던 비문(碑文)에
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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