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오승철 시조집 ‘터무니 있다’

김창집 2015. 5. 26. 16:17

 

지난 토요일

오승철 시조집 '터무니 있다' 출판기념회가

그의 시비가 있는 머체왓길 들머리에서 있어

거기 다녀왔다는

순동 성님광 성운이 아시의 얘기를 듣고 조금 미안했는데,

 

오늘 오후에 우편으로

그 시조집을 받았다.

 

이리저리 읽다가 몇 편을 골라

지난 일요일 한대오름 산행 중

신록이 너무 좋아 찍어둔 사진과 함께 올린다.

 

 

♧ 터무니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 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4. 3땅>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꿩으로 우는 저녁

 

 

♧ 누이

 

쇠똥이랴

그 냄새 풀풀 감아올린 새순이랴

목청이 푸른 장끼 게워내는 울음이랴

초파일

그리움 건너

더덕더덕 더덕밭

 

 

♧ 까딱 않는 그리움

 

어느 산간

어느 폐교

종소리

훔쳤는지

 

쇠잔등 굽은 오름

도라지꽃 한 송이

 

그리움

까딱 안 해도

쇠울음만 타는

가을

   

 

♧ 매봉에 들다

 

하늘은 말씀으로 세상을 거느리고

도랑물은 구름으로 하늘을 거느리네

봄날이 다하는 길목

누가 날 거느리나

 

볼 장 다 본 장다리꽃

설렘도 그쳤는데

삼십년 외면해온 그 오름에 이끌렸네

첫 시집 못 바친 봉분

무릎 꿇고 싶었네

 

사랑도 첫사랑은

한 생애 허기 같은 거

주거니 받거니 잔 돌리는 장끼소리

봄 들판 깽판을 놓듯 푸릇푸릇 갈아엎네

   

 

♧ “셔?”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꽃 얼음새꽃 까치무릇

솥뚜껑 여닫는 사이 쇳물 끓는 봄이 오네

 

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장다리꽃 담 넘어 수작하는 어느 올레

지나다 바람결에도 슬쩍 한번 묻는 말

“셔?”

 

그러네,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 딱지꽃

 

신제주 어느 변두리 골목과 골목 사이

거미줄 그어놓듯 해장국집 차린 아내

가끔은 중국말 제주말 걸려들고 있었다

 

누구의 한때인들 끗발 한 번 없었으랴

밤마다 가슴에 쓰던 사직서를 내밀고

철지난 세상에 나와 저 혼자 핀 딱지꽃

 

이승을 뜰 때에도 이렇게 혼자라면

성당의 저녁미사는 뭐 하러 드리는가

불빛이 불빛에 기대 싸락눈 달래는 밤

 

 

♧ 봄꿩

 

대놓고 대명천지에

고백 한 번 해본다

 

오름만 한 고백을 오름에서 해본다

 

갓 쪄낸 쇠머리떡에

콩 박히듯 꿩이 운다

 

 

♧ 추렴

 

이따금

섬잔대 떼 오름 건너는

방어철

세상에서 한 발짝씩

물러앉은 불빛들이

낙향한 애월의 밤을

추렴하고 있었다

 

새 대가리 말 대가린

바람 쪽을 향한다는데

종호 선생 석희 선생

창집의 형 성운이 시인

비틀랑

시조 종장을

끌고 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