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석화 시인의 시와 병꽃

김창집 2015. 5. 29. 06:42

 

깁스를 풀어줄까 봐 2주만에 병원에 갔는데

다시 2주 후에 오라면서 붕대만 갈아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금간 뼈가 붙는데도 기간이 오래 걸리나 보다.

 

곱게 핀 병꽃을 찍고 와

마술처럼 변하는 빛깔을 보다 말고

한 때 그 시에 매료되었던

강석화 시인이 생각났다.

 

강석화 시인

단국대학교 행정학과,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8년 ≪순수문학≫으로 등단

천안낭송문학회, 풀동인 회장 역임

한국동인지문학관 운영위원

충남문인협회, 천안문인협회 회원

국민건강보험공단.

 

 

♧ 늙은 보리 - 강석화

 

삶의 비결은

내 안의 초록을 손바닥에 꺼내어

햇빛으로 구어내는 것

 

추수 끝난 빈 들녘에 홀로 씨 뿌려져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체온을 지켜내는 것

 

보리피리 불어줄 아이

보릿고개도 사라져

내세울 건 옛이야기뿐이어도

들녘을 점령한 어린 벼 틈에서

수염을 쓰다듬다가

죽어 씨앗을 남기며

 

보리는 보리대로

벼는 벼대로

순서대로 가는 것  

 

 

♧ 소쩍새 - 강석화

 

봄이면 앞산은 쑥으로 덮이고

억새는 가을바람에 은빛으로 휘날렸다

밤을 틈타 피어나는 달맞이꽃을 보며

소쩍새는 여름 내내 울었다

한 사람이 내 가슴을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날 불도저가 몰려와 나무를 뽑고 산을 깎았다

껍질이 벗겨진 산의 속살은 모래처럼 푸석거리고

소나무 우거졌던 곳은 야외무대가 되었다

나도 한 사람을 지워야 했다

내 속살도 푸석거렸다

 

장맛비가 쏟아져

새 공원에 골이 파이고

토사가 흘러 야외무대를 덮쳤다

내 안에도 비 내리고 토사가 흘러내렸다

 

밤새 비어있는 야외무대를 보며

이제는 울지 않는 소쩍새를 생각한다

풍경 하나 지우는 일에

사람들은 이다지도 서툰 것일까

새로 채워지리라고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 운초 가는 길 - 강석화

 

가는 봄 붙잡을 수 없네

부용화 곱게 피어 연못 가득 붉어도

님의 모습 구름같아

우러르다 꽃잎 져도 내려올줄 모르네

천만겹 인연으로 몸을 묶어도

어긋난 세월 당길 수 없어

시작도 끝도 겹쳐지지 않는 얼굴

광덕산 소나무 길 운초 가는 길

연꽃으로 살다 풀잎으로 누운 자리

외줄기 삼킨 마음 詩로 돋아나

천년을 지지 않는 꽃이 되었네

나비보다 환한 미소 진흙이 되고

봄밤의 짧음을 소쩍새 멀리 우는 곳

꽃바람에 취한 길손 제 늙는 줄 모르고

지는 꽃 짙은 향기에 탄식하며 지나네

   

 

♧ 용의 발톱 - 강석화

 

다섯 발톱 온전한 용을 만나고자

마침내 봉정사에 이르렀으나

아름드리 배흘림기둥은 쩍쩍 갈라져

마른 속살 드러내고

화려한 단청도 천년 풍상에 시들어

구름인 듯 연꽃인 듯

 

먼 옛날 바람 일고 천둥비 가득할 때

재 너머 검은 하늘 섬광으로 가르며

긴 몸 굼실, 우르릉 불길 토하다

속 깊은 산골에 긴 꿈으로 숨어있나

날 저무도록 온 가람 더듬다

대웅전에 돌아 앉아 지쳐 바라보니

 

부처님

빙그레

 

그 너머 어둠 속에 피어나는 불꽃 다섯

초생달 발톱되어

나를 안고 날아오르네

   

 

♧ 안부 - 강석화

 

몰두할 대상을 잃어버려

머릿속이 겨울 들판 같고

오랫동안 가슴에 다녀간 이 없어

입술에 녹이 스는데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삽니다

면역이 될 수 있다는 게 행복이겠죠

그게 아니라면

의미부여에 지쳐버린 얼굴과

공허로 채워지는 대화를

어찌 견딜 수 있을까요

마주할 때마다 굵어지는 금줄을 넘어

비둘기 날아들면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나

봄빛 같은 외출을 준비하렵니다

 

잘 지내죠?

 

 

♧ 새우 - 강석화

 

한 병의 소주를 위해

새우 몇 마리를 놓고

펴지지 않는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사업과

실직 3년차의 쓴 웃음이

잠시 담배연기였다가 흩어지고

우리는 새우와 숨가쁜 기침을 나눈다

고향을 떠나온지 얼마나 되었나

여인의 살결같은 그리움 깎아내며

낯선 땅으로 밀려다니다가 이 구석에서

우리 마주보고 있구나 눈물 한 방울 없이

비틀리고 껍질 벗겨져

창백한 처녀의 속살로 떨고 있구나

입 안에 안겨오는 오도독한 생살의 향기로움

먼 첫날밤, 움추리던 그녀의 젖가슴만 같아

어뢰처럼 물살을 가르던 힘찬 등줄기도

이제 탄력을 잃었구나

굽은 등 다시 펴지는 날

세상을 질주하리라 수염 긴 늙은 새우여

서러움도 안주가 되는 포장마차에 둘러앉아

아직은 끄떡없다며 소주 몇 병을 더 비우고

물 좋은 새우였다가 이제는 껍질만 남은 사람들과

바다를 찾아 떠난다

떠들수록 외롭고

등이 휘어지는 밤에

 

 

♧ 향기 나는 말 - 강석화

 

단골식당의 주인 아줌마

외동딸이 취직이 되었다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꽃미소를 건넨다

그저 고맙다고

 

골목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져

짐승 같은 욕설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만든다

원수가 따로 없다고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이 비롯되었듯

우리의 만남도 말로써 빚어지는 것

 

바라오니

내 입에서 향기 나는 말이 샘솟게 하여

당신을 향기롭게 하소서

내 입에서 가시를 뱉어

당신의 가슴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