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6월호는 수연 박희진 시인의 추모특집으로 꾸몄다. 한때 ‘시낭송 운동의 대부’라 불리었고, 예술원 회원이신 선생님의 특집은 임보, 이무원의 추모시, 고인의 시 10편, 김금용의 ‘탐방기’에 연보를 덧붙였다.
‘권두 에세이’는 이재부의 ‘시화 만당’, ‘신작시 12인 選’으로 정성수 박정래 유진 민문자 조성순 박동남 성숙옥 신단향 박봉희 오명현 이령 조봉익의 시를 실었고, 특별기획 연재시 홍해리의 ‘치매행致梅行’, 기획연재 이인평의 ‘인물시’ 역시 여전하다.
연작시 감상은 김두환의 시 5편과 박승류의 해설,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박홍의 시 10편과 시작노트, 다음 연재물인 조영임의 ‘한시한담漢詩閑談’,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가 이어지고, 끝에 ‘시인의 읽는 시’는 나병춘이 담당했다.
요즘 한창 물오른 두루미천남성에다 시 몇 편을 옮긴다.
♧ 호일당 주인이시여, 평안히 가시옵소서 - 임보
― 수연 박희진 시인 영전에
수연 선생이여,
꽃 피는 봄날 그렇게 훌쩍 떠나시는군요
백발도 성성한 신선 같은 그 풍모
이젠 다시 뵈올 수 없게 되었다니
물처럼 맑고
대처럼 곧고
솔처럼 푸르고
쇠처럼 강직하신
호일당(好日堂)의 주인 수연(水然)이시여
당신께서는 한평생 시를 위해 사신
시의 사도이며 시의 성직자셨습니다
수연이 걸으신 시의 발자취는 눈부십니다
4행시, 1행시, 17자시, 13행시…
소나무시, 섬의 시, 자연시, 기행시…
수많은 시의 형식들을 빌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노래했습니다
그리하여
1960년『실내악』에서 2014년『영통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권의 시집을 남겼습니다
생전에 당신은 스스로를 자평하시길
‘시의 9단’이라 일컬으셨는데
당신은 9단을 넘어 시의 국수(國手)십니다
이제 번거로운 세상일 다 떨치시고
평안한 마음으로 천상에 오르소서
그 나라에 가셔서도
시의 집을 짓고
시의 옷을 입고
시의 성을 쌓고
시로 만든 음식 시로 빚은 술 드시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시의 친구들과 더불어
영원한 시의 공화국을 이룩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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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3월 31일 오후 6시 56분 삼성병원에서 별세함.
♧ 수연 박희진 선생님 - 이무원
참된 시의 사제이시며
찬미 삼매에 드신 풍류도인이시여!
무욕과 무애로 자족하신 은자,
그분의 영토엔 고요함이 무리지고
그분의 시 속엔 오직 맑은 영혼들로 가득해
그분의 생활은 외로움도 빛이였나니
인간의 영성에 기대어
언어 이전에 정신으로
하늘, 땅, 인간과 마주앉아
오직 시의 정도만을 고집하신
우리의 자랑,
우리의 스승,
끝내는 자신이 시가 된
이 시대의 자유인이여!
시 낭독에 대한 열정은
선생님의 또 다른 혼이었으니
낭낭하고 열정적인 선생님의 시 낭독은
지금도 도도한 강물로 흘러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나니.
이제 선생께서는 천 년 노송 아래 정좌하시고
선정에 드시니
모든 고요가 꽃으로 피어
이제 세상은 모두 꽃밭이다.
2015. 4. 2.
영결식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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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원 시인은 이 시를 마지막으로 읽고 보름 뒤인
4월 17일 오후 2시20분에 일산 백병원에서 영면함 - 편집자
♧ 무소유법無所有法 - 박희진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한 포기 난초처럼
있는 그대로 오직 족할 뿐 아쉬움이 없는 것
그것이 무소유의 참모습일세
난초 아닌 것은 아무것도 지닌 게 없기에
모든 것과 소통하고 있음이여
어디 난초뿐이랴
해도 달도 사슴도 바위도 그렇다
그대 무소유를 닮고 싶은가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느끼고 깨닫게나
자연법自然法이 진여眞如임을 무소유법임을
♧ △ - 정성수
저 가장 높은 절정은
얼마나 추운가
고독한가, 얼마나
얼마나 지상이 그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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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3. 24
일당산 곰지기계곡에서
♧ 수상한 목련화 - 민문자
동구 밖 한 그루 목련화
꽃샘추위 잘 견디고
올해도 우리 동네 일등
제일 먼저 피워냈구나
사춘기 처녀유두 같던 꽃봉오리
우윳빛 속살 목화송이로 벙글었네
아침저녁 마을버스 안에서 보기 딱 좋은
기분 좋은 꽃구름
옥양목처럼 하얀 꽃인 줄만 알았지
며칠 지나니 드문드문 연한 자목련이 웬일이야
미끈한 아랫도리 훔쳐보니 가랑이가 수상하다
호! 외간녀가 뛰어들었나 보다
♧ 기하학적 사랑 - 이령
a.
일사분면에 애인들을 열거한다
머리 없는(둘) 심장 둘인(셋), 다리 짧은(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머리를 가르자
해가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심장을 파고들자
해가 무수하다
심장을 파며 머리를 가르고 한 점에서 절뚝이자
우리 사랑은 수렴되거나 발산된다
b.
이사분면에 꽃을 그린다
색 바랜(하나), 새순 핀(셋) 흐드러진(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색을 거부할 때
해가 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가슴에 새순을 피워내자
해가 뜬다
색 바랜 후 새순 돋고 꽃가지 늘어지면
우리 사랑은 답이 없거나 무수한 극과 극에 닿는다
겹치거나 평행을 반복하다
결국 원점을 향하는 우리 사랑은
무한대다
♧ 제비붓꽃 - 홍해리
- 치매행致梅行 ․ 123
밥도둑 하나 잡아 오면
아내의 입맛이 돌아와 꽃이 필까
단무지도 없는 단순 밥상머리
애멀무지로 떠넣는 맛없는 마른밥
보릿고개보다 넘기기 힘드네
한평생 애바르지 못하고
발밭게 살지 못한
아내여, 아내여
아무래도 못난 사내인 내가
밥맛 입맛 다 떨어진 당신
제사날로 밥숟갈 갈 수 있는
밥도둑 퍼뜩 모셔와야겠네
제비붓꽃 같던 아내
양볼제비하는 모습 볼 수 있다면.
♧ 봄날 띄우는 편지 1 - 김두환
그 텃밭 양지바른 데는
장다리꽃 곱게 피었죠
그이 가슴팍도 물올라 감들어
산수유꽃들 올려 겨루고 있겠네요
그 집에 가까운 강 가엔
피라미들 톡톡 봄물 입질하겠네요
그이 오지랖도 실긋실긋 설레겠지만
봄기운 아지랑일 오착誤捉하진 않겠죠
그 집에서 쳐다뵈는 산자락엔 오래 산
텃새들 봄맘 푸느라 휙휙 뒤넘기치겠죠
그대 속정도 그런 정경에 취해서
보글보글 석어 향기 뒤발하겠네요
뒷감당에 벌겋게 쏴 돌리는
눈총기 여기 꽂히는가 썩 뜨겁네요
물과 땅은 서로 드티지 않게 또한
무너지지 않게 도모하고 점수해서
많은 생물들 키워내듯이 언젠가 날아든
그이 먼빛 지성을 조심조심 키워서
지금껏 화운和韻 맞수로 삼고 있네요
가끔 한밤 탄금가 불려 선禪에 드네요
만만한 그 더늠 진지하기야 휘어잡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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