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여름, 왕이메 기행

김창집 2015. 5. 31. 07:40

 

△ 오름으로 가는 길

 

  6월, 벌써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지난번 아부오름에 다녀온 뒤로 아이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5학년 딸이 가정의 달 ‘행복한 우리 집’ 발표대회에 ‘오름 나들이’라는 제목으로 우수상을 받았다며 우쭐대고, 그 발표를 지켜보았던 3학년 아들도 ‘처음으로 누나가 자랑스러웠다.’고 야단이다.

 

  그래 본격적으로 오름에 가는 거야. 이번에는 정년퇴임 후 ‘오름 길라잡이’ 과정을 이수해 동기들과 오름 나들이에 한껏 재미를 붙이신, 아이들 외할아버지에게 길라잡이를 요청했다. “오호라. 고놈들. 그래, 고 귀여운 것들이 오름에 맛을 들였더란 말이냐?”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아주 즐거워하신다.

 

  “나 때문에 뭘 차리진 말아라. 막걸리 한 병이면 족하다.” 하는 부탁에도 수고하실 아버님을 위해 부추전 두어 장 지져 넣고, 마침 잘 익어 먹음직한 깍두기를 챙겼다. 생각해 보면 아버님과의 나들이가 얼마만인가? 너무도 아득하여 기억에도 없다. 젊은 시절의 아버님은 너무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아버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애조로를 통하여 평화로로 접어들었다. 이왕 밖으로 나가는 길, 연동과 노형동을 거치며 밀리는 차속에서 진을 뺄 필요 없이 조금 편한 길을 찾는 것도 생활의 지혜란다.

 

  평화로에서 광령으로 나뉘는 세거리를 지났을 때, 길 양쪽에 피어 있는 짙은 분홍색 무더기는 ‘송엽국’이라는데, 외래종으로 여름내 길섶을 장식한다고 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노란꽃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망종화’라면서, 제주도가 제주도다워지려면 수종 하나 선택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여 제주특산종을 개발하여 심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신다. 장미는 색이 바래였고 지금 막 빨갛게 피어나는 건 협죽도, 분리대 화단에 심어 하얀 꽃을 피우는 ‘다정큼나무’는 이름과 달리 토종이라 했다.

 

  경마장을 거쳐 ‘잃어버린 마을’ 원동을 지나면서는 아이들에게 4.3을 풀어 설명하시느라 바쁘다. 그리고는 새별오름. 우수축제로 지정되어 해마다 ‘들불축제’로 흥성거리는 벌판, 이제는 ‘무사안녕’이라는 글자가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봄을 지나는 동안에도 상처처럼 그대로 남았었다. 축제는 옛날 정기적으로 행하던 들불 놓기를 활용했다면서 어렸을 적, 밤에 불구경하던 얘기를 들려주신다.

 

 조금 더 가 교통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오른쪽으로 들어갔다가 왼쪽 굴다리를 지나니, 화전동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 오지로 알려졌던 곳인데, 지금은 골프장 두 개와 관광시설까지 들어섰다. 거기서 차로 5분이나 달렸을까? 드디어 목적지 ‘왕이메’ 표지판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 오름에서 자연을 배운다

 

  안내 간판에는 ‘옛날 탐라국의 삼신왕이 이곳에 와서 사흘 동안 기도를 드렸다.’ 하여 오름 이름을 ‘왕이메’라 하였고, ‘실제 높이 92m의 나지막한 오름으로 둘레는 3,665m인데, 둥그런 분화구의 깊이가 101.4m나 되는 웅장한 화산체를 갖고 있다.’고 나와 있다.

 

  아버님은 일행을 모아놓고 간단히 몸 풀기 기본운동을 시켰다. 이어 ‘아무리 낮은 산을 오르더라도 언제나 경건한 자세로 임해야 하며, 자연이 주는 고마움을 생각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시고는 출발이다. 도랑을 건너 20m쯤 오르니, 둘레를 도는 길이 나타났는데, 약도에 표시된 대로 곧바로 올랐다.

 

  울창한 숲에 쪼르르 하얗게 매달려 꽃을 피운 것은 ‘때죽나무’이며, 그 모양이 흡사 종과 같다 하여 제주어로는 ‘종낭’이란다. 얼마 안 올라서 탁 트인 억새밭이 나타나고 앞에 나지막한 왕이메 정상부가 보인다. 숲 위로 하얗게 빛나는 꽃은 ‘산딸나무’ 꽃이라는데, 다가가서 보니 꼭 나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

 

  가을에 억새가 볼만하다는 벌판을 지나 숲에 다다랐을 때, 고로쇠나무가 꽤 많다면서 우리들을 세워 놓고, 고로쇠나무와 단풍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 같이 단풍나무과인데 고로쇠잎은 노랗게 물들고 단풍잎은 빨갛게 물들며, 고로쇠잎을 오리발, 단풍잎은 닭발에 비유해 설명하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그거인데 관심을 갖고 자꾸 보다보면, 고것들이 살며시 다가와 악수를 청한단다.

 

  그쯤 되면 아버님도 많은 이력이 붙었다. 그리고는 올라가면서 계속해서 나무 이름을 불러댄다. 서어나무, 졸참나무, 사람주나무, 까치박달, 팥배나무, 산뽕나무, 꾸지뽕나무…. 그렇게 부르던 이름은 소나무가 늘어선 능선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서 얼마 안가 정상이 나타나고 환히 트인다.

 

  바로 동쪽에 한라산이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남쪽으로 산방산이 보인다. 주변에 늘어선 오름들은 숫자가 셀 수 없이 많다. 아버님은 주요한 오름이라면서 몇 개를 골라 가리키며 설명하시고는 내려가자고 한다. 험한 바위가 있는 목을 지나니 바로 삼나무 숲이다. 아버님은 그곳에 우리를 멈추게 하시고는 배낭을 내려놓고 깊은 호흡을 하라면서 숲이 주는 고마움을 다시 늘어놓으신다. 설명이 끝나자 아버님은 다시 능선을 돌아 일제강점기 때 파놓은 수직땅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시고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너희 시대에는 이웃나라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북쪽 삼나무 그늘에 이르러서 간단히 간식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아이들이 김밥을 유달리 맛있어 한다. 아버님도 막걸리 한 잔이 꿀맛이라면서 ‘너희들과 함께여서 너무 좋았다.’고 하신다. 이어 조심스럽게 분화구에 들어서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고 웅장했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광경에 우주에 내린 것 같다며 좋아한다. 제주도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던 애 아빠도 ‘이런 곳이 다 있었다니….’ 하면서 아버님께 감사하고는 가다가 맛있는 것 사드려야 하겠다고 벼른다.

 

  덥다며 리모컨 잡이가 되어 방구석을 전전했을 애 아빠가 장인과 자연스레 만나고, 아버님 또한 외손주들과 어울려 신나는 시간을 갖게 만든 것은 바로 반나절의 오름 나들이였다.

 

                                                                        (*한마음 병원 원보 ‘올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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