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가을, 영아리오름 기행

김창집 2015. 6. 1. 08:16

 

 

△ 오름으로 가는 길

 

  제주의 가을은 귤빛으로부터 온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검푸르던 귤이 9월이 되면서 옅은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백로가 지나면서부터 은근히 노란빛을 띠어간다. 올해는 절기가 빨라 추석과 백로가 한날이어서, 제수용 감귤이 조금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추석을 넘긴 일요일, 시 외곽지대를 벗어나면서 본 밀감 밭에서는 이제야 노릇한 기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의 영아리오름 산행은 처음엔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지난 산행 때처럼 우리 식구와 아버님, 다른 건 어머님까지 동행이다. 명절이 끝나고 친정에 온 조카들이 우리 아이들이 늘어놓는 오름 자랑에 아버지를 졸라 모처럼 오름에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버런한 남자 조카가 어제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같이 가는 어머님은 평생을 쉬지 않고 오몽했다고 허리가 아파 안 가시겠다는 걸, 걸엄서야 나아진다고 아버님이 등을 떠밀었다.

 

  평화로를 뒤로 하고 산록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꽃이 하얗게 핀 메밀밭 옆을 지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던 아버님이 잠잠할 리가 없었다. 차를 밭 옆에 세우게 하고서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평소에 좋아하시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한 대목을 줄줄 외우신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사진 위 '물매화', 아래 '자주쓴풀'

 

△ 걸으면서 만난 들꽃들

 

  안덕 쓰레기 매립장 입구는 차를 몇 대 세울 만큼 공간이 있어 편안히 주차할 수 있었다. 주변엔 이제 막 피어난 억새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아버님 말씀이 억새는 처음 피어나 꽃을 피울 때와 씨가 익어 하얗게 벌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면서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입구에는 ‘돌오름 임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에 만들어 놓은 숲 산책로를 통하여 돌오름 왕복은 물론 1100도로로 통하는 한라산 둘레길 2코스로도 이어진다고 그려 있다.

 

  입구 옆 산불감시초소 옆에 감시원 아저씨의 작품인 듯 보이는 현무암 자연석 돌무더기를 보면서 아이들이 신기한 듯 웃어댄다. 그런 아이들을 불러놓고 아버님이 “너희들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알아?” 하신다. 어머님이 “가네덜이 낭(참나무)을 압니까게.” 하면서 핀잔이다. 아버님은 “그러면 이 나무로 무엇 하는지 당신 알아?” 하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시건 무시거게 숫(참숯)도 굽고, 초기(표고)도 내우주기.” 아버님은 언제 그걸 다 알았냐는 듯이 놀래며, 아이들에게 차분히 설명한다. “이건 상수리나무인데 참나무로 알려져 있고 도토리가 열리며, 표고를 재배할 때는 이 나무에 구멍을 뚫고 종균을 넣어 자라게 하는 숙주로도 쓰이고, 또 숯을 구우면 참숯이 되는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나무지. 나무를 심으려면 바로 이런 나무를 심어야 해.”

 

  아이들이 신기한 듯 나무를 만져 보고 있는데, 아버님이 도토리 두 알을 따다 외손주들의 손에 꼭 쥐어준다. 그리고는 길을 걸으면서 아는 꽃을 만나면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설명이다. “이 보랏빛 작은 꽃은 꽃향유인데 꿀이 많아 꿀을 따는 밀원식물이고, 요 별처럼 생긴 것은 자주쓴풀인데 귀중한 한약재로 쓰이지. 그리고 참 여기 귀한 꽃이 보이네. 이 보랏빛 투구 모양으로 생긴 꽃은 한라돌쩌귀야. 육지에는 비슷한 투구꽃이 있는데, 이것은 조금 다른 제주 특산이란다.”

 

  조그만 비탈길을 지나 너른 들판 초입에 이르렀을 때, 길섶에 핀 조그만 보랏빛 꽃 앞에서 아버님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사진을 찍을 때였다. 어머님이 다가가더니 “아이고, 요거 오랜만이 봐졈저, 물웃인게. 이거 옛날 보릿고개엔 뿌리 팡 엿허영 먹는 거라.” 그제야 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릇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신다.

 

  그 다음부터는 모르는 게 있으면, “이녁, 요거나 알아지크라?” 하고 물었고, 어머님은 십중팔구 “아. 그건 뭣이고 검질(김) 맬 때 애를 멕인 거.”라 대답을 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귀한 집에 태어나 공부만 하며 자랐던 백면서생인 아버님이랑 시골 딸 부잣집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여 김매고 촐 베며 자랐던 어머님이라 차원이 다를 수밖에.

 

  그리고 우스운 건 아버님과 어머님의 자세가 완전히 역전된 모습이다. 이제까지 살면서 아버님은 언제나 어머님에게 학생처럼 가르치며 훈계하는 식이었고, 어머님은 말없이 “예, 예.” 하며 순종해왔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이 고분고분하게 배우려는 자세에 신이 난 어머님은 허리 아픈 것도 잊은 채, 아는 것 모르는 것 신나게 설명하며 오름을 단숨에 올라버렸다.

 

 

△ 오름에서 자연을 즐긴다

 

  오름 정상에는 ‘해발 693m’라는 팻말이 서 있고, 그 아래로 마주 보는 듯한 돌이 정답게 서있는데, 내가 ‘대화하는 돌’로 명명했다는 얘기와 함께, “이 오름은 영아리라는 이름이 신령스러운데, 사방으로 어오름, 마보기, 하늬보기, 이돈이오름이 옹위하듯 서있다.”고 한다. 멀리 동쪽으로 한라산과 남서쪽으로 산방산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 산과 바다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단다.

 

  간단히 요기를 끝냈는데, 장인과 사위가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양쪽에 자리한 골프장을 놓고 외지인들에 의한 토지 잠식과 곶자왈을 훼손하는 자연 파괴에 대해 성토한다. 그 사이에 어머님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양손에 무엇을 들고 와서 아이들을 부른다. 허리가 아프시다면서 오랜만에 산에 나오니 신이 나서, 어떻게 찾았는지 으름이랑 머루를 한 움큼 따왔다. 소싯적 촐(꼴) 비러 다니며 익힌 실력이란다.

 

  아버님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의아해 있는데, 어머님은 모처럼 야생 열매를 접한 사위와 아이들에게 어렸을 적 이야기를 신나게 해댔고, 나는 아버님 앞에서 난생처음 기를 펴는 어머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 배꼽을 쥐었다.

 

                                                                          (* 한마음병원 원보 '올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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