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겨울, 어승생악 기행

김창집 2015. 6. 9. 07:47

                                                                                                          * 눈 쌓인 어승생악의 모습 

 

△ 오름으로 가는 길

 

  제주의 겨울은 한라산의 눈빛으로부터 온다. 남한의 최고봉답게 첫눈 소식을 전해주는 곳, 그래서 눈 쌓인 봉우리는 더욱 장엄하고 의젓하다. 아직도 산야엔 산국, 거리 화단엔 온갖 꽃들이 환히 웃고 있는데, 노란 귤빛 너머로 보이는 한라산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리고 한참 지나서 한파와 함께 찾아오는 폭설. 강설량이 백여cm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이면 사람들은 벌써 설레기 시작한다. 전국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기로 이름난 한라산 설경이 중앙 TV화면에 비치면, 그걸 보러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고 오름꾼들도 덩달아 신이 난다.

 

  그러나 아이들을 데리고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건 아직 무리라고 생각되는 가정에서 쉽게 눈과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어승생악 정도다.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어승생악은 한라산국립공원 안의 46개의 오름 중 사라오름과 함께 일반인의 등산이 허용되는 오름으로, 표고가 1,169m이면서 한라산체에 바짝 붙어 있어 눈이 많이 쌓일 뿐만 아니라,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눈 속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다.

 

  지난번 다리를 다쳐 산에 오르지 못해 안달하던 친정 조카들은 이번 눈 내리면 오름에 썰매 타러 같이 간다고 벼르고 별러온 터라 토요일 저녁에 눈 내리는 광경을 보다가, 저희들끼리 전화를 주고받으며 방한모와 스패츠, 비료포대까지 챙기고 야단이다. 덩달아 아버님까지 전화를 걸어와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며 아침에 터미널에 모이기로 약속했는데, 괜히 서두는 목소리가 들떠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 1100도로에서 바라보는 눈 풍경

 

  아이들과 오빠네 식구까지 합치다 보니 대부대가 되었고, 아버님은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손자손녀 복장을 점검하느라 신이 나셨다. 1100도로로 달리는 버스를 타는 곳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어리목까지 표를 끊은 우리들은 그 뒤에 따라 붙었다.

 

  차가 애조로를 넘어서면서부터 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도깨비도로 옆 탁 트인 곳에 이르렀을 때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아직도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뒷좌석을 차지한 아이들은 시끄럽다고 제지 받을 정도로 떠들어 댄다. 아직까지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놀아주지 못했던 오빠도 가끔씩 시간을 내야겠다고 덩달아 싱글벙글이다.

 

  한밖저수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나무가 온통 눈꽃으로 덮였다. 아이들 아빠도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일행은 어리목 입구에 내려 어리목광장으로 진입했는데, 아이들은 벌써부터 편 갈라 눈싸움을 하는가 하면 눈 위를 구르고 난리가 났다. 생각해보면 너희들 어디 마음껏 뛰놀아 보라고 터 놓아준 것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눈 쌓인 산을 오르면서

 

  어리목 광장은 눈이 가득했는데 거의가 윗세오름으로 올라가는 인파고,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뒤편 어승생악으로 오르는 이는 드물다. 시간이나 건강 때문에 한라산까지 가지는 못하고, 그래도 한라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어승생악이라고 하시면서 아버님은 1시간 정도면 다녀오는데, 우리는 시간에 구애받지 말자고 하신다.

 

  먼저 올라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처음에는 조심조심 올랐는데, 아이들은 벌써 익숙해져서 겅중겅중 뛰어오르다가 ‘오름에 사는 동물’ 같은 생태 해설 안내판을 읽는다. 잎사귀가 다 떨어져버린 나무에도 상고대라 하여 하얀 색을 두르고 주목(朱木) 같은 상록수에는 눈 덮인 모습이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 풍경을 즐기다보니 어느덧 정상이다.

 

  우리가 다다를 무렵 축복처럼 햇빛이 내리비치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빛난다. 아버님은 먼저 기념사진을 찍자며 서두르시더니, 끝나자마자 한라산을 우러르며 우리에게 허여된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을 말하신다. 아이들에게도 자연에 대해 항상 겸손할 것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멀리 눈 아래로 펼쳐진 시가지를 보면서, ‘옛날 화랑들처럼 잠시 내가 몸담은 곳을 떠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웅장한 산을 보면서는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고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티를 내신다.

 

  또 거기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시설인 토치카를 보면서 너의 증조할아버님이 이곳에 강제 노역에 동원돼 일을 했는데, 오키나와처럼 제주도 전체가 전쟁터로 변해 불바다가 될 뻔했다는 역사와 너희들 세대에서는 서로 싸우지도 말고 힘을 길렀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신다.

 

  내려오는 길은 일사천리였다. 썰매를 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붙어 있어 아이들이 아쉬워했지만, 내려가서 눈밭에서 한번 실컷 타게 해준다는 약속으로 무마되었다. 아이들은 어느 틈에 다 뛰어내려 가버리고, 모처럼 만난 오빠와 올케, 그리고 우리 부부가 어울려 그간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 탐방안내소에서 한라산을 배우고 눈썰매로 마무리

 

  아버님은 한라산 탐방안내소에 들러 가자고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에서 해설하시는 분들과 잘 아시는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영사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제주섬의 형성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준비되어 있는 영상을 보고 나서, 아이들을 재촉 전시실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암석의 종류와 오름 같은 제주섬에 대한 모든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아버님은 다시 아이들을 모아 신바람 나게 설명을 하고, 다음 층으로 오른다. 전시실에는 노루와 오소리 같은 동물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 숲속을 재현시켜 놓았다. 아이들은 특히 새소리에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새소리를 눌러 들었다. 제주휘파람새 소리가 매우 청아하게 들리고, 어렸을 적 시골에서 들었던 맹꽁이 소리가 반가웠다. 다음 전시실에서 아이들은 오늘 여기저기서 배운 내용에 대한 문제를 풀어보며 으스댄다.

 

  어리목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 한밝저수지에 내려 다시 들른 눈밭에서 아이들은 비료 포대로 만든 썰매를 타며 너무 신나한다. 한쪽에서는 아버님과 아들, 그리고 사위가 모처럼 한데 모여 막걸리와 이야기에 취해있고, 올케와 나는 밀고 당기고 씨름하며 뒹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적어도 사촌끼린 저 정도로 놀아야 사이가 돈독해지고 커서 형제처럼 느껴지겠지.’ 하고 대견해했다.

 

                                                                          (* 한마음병원 원보 ‘올레’ 연재)

                                                                        

                                                                                     * 정상에서 본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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