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봄, 아부오름 기행

김창집 2015. 5. 30. 07:46

 

△ 오름으로 가는 길

 

 봄은 생동의 계절이다. 겨우내 웅크렸던 만물이 소리 없이 움직여, 바야흐로 생의 찬가를 부르며 천천히 피어난다. 이럴 즈음, 한가로운 주말을 이용해 가족끼리 오름에 한 번 올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 반나절 공부 시간 뺏기는 게 대수랴. 휴일이기에 자연과 함께 하며 얻는 것 그에 못지않으리라.

 

 오름에 오르는 일은 편해서 좋다. 등산처럼 장시간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조금치의 운동량을 가미하여 산책하듯 걸으면 되는 것이다. 멀리 여행을 떠나려 날짜를 잡아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가방을 꾸리는 번거로운 절차도 필요 없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배낭에 김밥 두어 줄 싸고 음료수와 과일 몇 알 집어넣어 가벼운 옷차림에 신발만 갈아 신으면 그만이다. 그럴 시간이 없다면 봉개동을 지나다 슈퍼에 들르면 된다.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주변에 보이는 청보리밭, 한 주일 피로했던 눈을 씻고 잠시 아이들에게 보릿고개 이야기를 해줘도 좋으리라. 어렸을 적 그 봄날들은 어찌 그리 길고 배가 고프던지….

 

 개나리꽃 만발한 길을 지나 남조로 네거리를 넘어서면 원(院) 터를 지나게 된다. 지금은 음식점들이 몇 개 들어서 있지만, 옛날에는 제주목과 정의현을 오가던 관원들이 말을 쉬게 하며, 요기도 하고 어두우면 하룻밤 묵기도 했던 곳이다.

 

 그곳을 지나고 나서 왼쪽에 나타나는 오름은 우진제비, 이어 밤톨 같은 웃밤, 알밤오름이 보이고, 다음에 길게 늘어선 오름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이다. 이 오름은 그 자체도 볼거리지만 오랫동안 꾸역꾸역 토해낸 용암이 천천히 흐르면서 만들어낸 동굴들이 걸작이다. 벵뒤굴을 필두로 만장굴, 김녕사굴, 용천굴, 당처물동굴 등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어 오른쪽 부대악과 부소악을 지나 대천동 사거리다. 거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바로 송당리로 통하는 비자림로. 양쪽으로 늘어선 삼나무가 멋있다고 지난 2002년 제1회 전국 ‘아름다운 도로’ 대상을 차지했던 길이다. 주변은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낙농을 통하여 굶주린 국민들에게 우유를 먹이겠다고 조성했던 국립송당목장 지대로 안에 당시 지어 놓았던 대통령 별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으로 쭉 뻗은 길이 나타난다. 이름 하여 ‘금백조로’, 금백조는 송당리 본향당 당신(堂神) 이름이다. 이 길은 성산포까지 이르는 샛길이지만 지금은 백약이, 좌보미, 거미오름 등 오름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얼마 안 가 편백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왼쪽 송당리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서 200m쯤에 바로 ‘앞오름’이란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송당마을과 당오름 앞에 있다고 하여 ‘앞오름(前岳)’이라 했다 하나 오름 책에는 ‘아부오름’으로 나온다. 

 

 

△ 오름에서 자연을 즐긴다

 

 신이 내린 땅 제주, 이렇듯 산이나 바다에 이르는 데는 차로 2~30분이면 족하다. 차에서 내려 표지석에 쓰인 내용을 훑고는 오름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봄날 오름의 공기는 부드럽고 상쾌하다. 일주일간 폐부 깊숙이 쌓였을 먼지를 털어내듯이 심호흡을 하며 오른다. 그러면 불과 10분도 못되어 오름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처음 본 사람은 분화구 속의 독특한 경치에 매료되기에 충분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밋밋한 언덕 같아 보이는데, 올라보면 분화구가 마치 올림픽 주경기장을 연상시킨다. 더욱이 안에 삼나무가 둥그렇게 심어져 있어 독특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능선 잔디밭에는 구슬붕이가 별처럼 빛나고, 양지꽃이나 개민들레가 노랗게 수를 놓는다. 개민들레는 너무 퍼져 있어 천대 받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금혼초라 하여 알아주는 들꽃이다. 안사면 동서남쪽으로는 이제 잎을 파랗게 내밀기 시작한 찔레나무, 국수나무, 쥐똥나무, 청미레덩굴, 멍석딸기 같은 가시덩굴이 곳곳에 뭉쳐 있고, 북사면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자라는데,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등이 섞여있다. 능선을 한 바퀴 돌며 신명나게 쏟아놓은 봄의 경치를 즐기노라면, 시 한 수 중얼거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다.

 

 가끔은 가시덩굴로 다가가 발치에 품은 제비꽃들도 보고, 살포시 피어오른 각시붓꽃을 보며 마음 설레던 그 때를 회상해 보기도 한다. 고사리가 솟아났으면 보이는 대로 한 움큼 뜯고 와 볶아 먹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소나 말을 놓을 때가 있는데, 해방 후 분화구 일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농사를 지으러 다녔던 농로가 있어, 오름 북쪽에서 서쪽 능선까지 비스듬히 올라 북쪽 안사면을 통하여 천천히 동쪽 안으로 뻗쳐있다.

 

 소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가시덩굴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본다. 농사를 지었던 곳의 경계는 밭을 경작하며 분화구에서 골라낸 화산석으로 둘러쌓았으며, 1960년대 이후 방풍 또는 경계용으로 그 둘레에 심은 삼나무가 자라 오늘날 이와 같은 풍경을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환경 때문에 이곳은 천주교인과 주민과의 갈등을 그린 영화 ‘이재수의 난’(1999년)의 촬영장이 되기도 했다.

 

 오름 능선에 피뿌리풀이 자라는데, 이 식물은 황해도 이북에 더러 분포하는 것으로 특별히 이곳 제주 동부지역 오름에 퍼져 있으나, 도채(盜採)로 멸종 위기에 놓여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실제 높이(비고) 51m, 둘레 2,012m에 불과한 오름이지만, 두어 시간 천천히 즐기다 돌아온다. 이렇듯 가족간 소통하고 힐링했는 데도 반나절이면 족하다.

 

                                                                         (*한마음 병원 원보 '올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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