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소중한 삶의 노래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찬미며, 또한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시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 예지와 의지가 빚어낸 영롱한 언어의 결정체 - 맑은 영혼의 집이다.’로 시작되는 ‘시의 선언’을 내세우고 발행하는 ‘우리詩’가 6월로 통권 324호를 냈다.
지난 번 이 시지의 내용과 작품 소개에 이어
이번에도 시 몇 편을 옮겨
요즘 한라산 기슭에 막 피어나는 함박꽃과 같이 싣는다.
♧ 한 허무주의자의 독백 - 정성수
일평생의 쓸쓸이 나의 날개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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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당산 곰지기계곡에서
♧ 인연이란 - 박정래
인연은 매듭이다
낯선 끈으로 만나
우연히 매듭이 엮어지면
시간만큼 자라며 굵어지는 매듭이다
인연은 에피소드다
소매 한 번 스침에도
사연과 이야기가 바람처럼 떠오르며
관심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관심만큼 웃음 주고 깊어지는 매듭이다
인연은 묘법이다
풀 수 없는 인생이 풀리기도 하며
잘 풀리면 세상이 꼬이기도 하지
지극 정성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고
진심은 무량수와 무한함수를 만드는 묘법이다
♧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 - 민문자
도화야
구마루 언덕 너머
할머님께 이것 좀 갖다 드려라
예
개나리 울타리를 돌아서
꽃비 내리는 벚꽃 터널을 지나
개복숭아꽃이 활짝 핀 마을로
껑충껑충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할머니이
오 내 새끼 어서 오너라
쑥버무리를 풀어 놓는 도화의 뺨에
볼그족족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
♧ 비의秘儀 8 - 박희진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자신의 모습을 닮게 하였듯이
시인은 스스로의 영혼의 구조 따라
한 편 시를 낳을 수밖에.
왜 좋은 시에 영성의 향기가 충만해 있는지
알 만하지 않겠는가.
♧ 감옥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122
1.
감옥은 춥고 어둡다
한여름에도 춥고 대낮에도 어둡다
감옥은 괴롭고 답답하다
꽃을 봐도 괴롭고 문을 열어도 답답하다
출옥을 해도 괴롭고 답답하고
탈옥을 해도 세상은 춥고 어둡다
2.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세상,
감옥입니다
속마음 한번 내뱉지 못하고 사는 세상,
지옥입니다
3.
기억을 잃어버린 백지인 사람
하루가 또 까무룩이 저물어
마주앉은 밥상머리
물만 밥에 목이 맵니다.
♧ 봄날 띄우는 편지 5 - 김두환
늦봄 빗밑이 무거우므로
꽃송이들 눌려 떨어지는구려
꽃이 진다고
그 꽃정 꽃맘이야 쉽게 사라지겠는가
꽃이 사라진다고
그 뒷생각 뒷불이 얼른 꺼지겠는가
꽃이 당한다고
그 작은 덧눈인들 뒤로 물러서겠는가
꽃가지가 무너진다고
그 속뿌리 곧바로 멈추겠는가
♧ 물소리 - 박홍
비가 오면 내 몸 속에서 물소리가 난다.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내가 난타되고, 소리가 소리를 씻어가면서 내 몸은 조금씩 가벼워진다. 먼 어느 산비탈에서 가문비나뭇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투득, 툭, 낙엽을 밟고 가는 빗소리. 낙엽 밑을 더듬어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물길을 찾아 내려가는 물소리도 들린다. 소리는 땅 밑으로 흐르면서 더욱 깊어지고 나는 비를 맞은 청무처럼 퍼렇다.
소리가 물비린내를 풍기며 흐른다. 체액들이, 수액들이 빗물을 타고 서로의 몸 속으로 은밀하게 녹아든다. 기억들이 꼬리를 흔들면서 흘러다닌다. 나는 자꾸만 다차원으로 해체된다.
♧ 부탁 - 나태주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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