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유적과 증언을 통해 본 호치민의 생애

김창집 2015. 6. 21. 08:03

 

 

 

                                     *호 주석이 주석궁 사용을 사양한 집과 우리를 안내한 비엣 선생

 

유적과 증언을 통해 본 호치민의 생애

   

□ 2015년 1월 4일 일요일 맑음

 

  하노이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다.

  어제만 해도 인천국제공항은 한겨울의 추운 날씨였는데, 알맞게 상쾌한 공기가 이국땅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 ‘제주문학의 집’ 소속 작가 30명은 엊저녁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에야 첫 일정으로 바딘광장에 가서 영묘와 주석궁 등을 돌아보게 된다.

 

*호치민(胡志明, 1890~1969) 주석.

 

  한번이라도 전후(戰後)의 베트남엘 다녀간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바꿀 만큼이나 영향력 있고, 집집마다 사진을 걸어놓을 정도로 위대하면서도, ‘호아저씨’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분.

  하기야 사회주의 국가라 일컫는 나라에서 혁명을 이룬 인물을 떠받드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랴마는, 하노이로 오기 전에 구해 읽은 미국인 월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주의 국가 여타의 인물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기에, 그게 모든 인민들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이 발로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 책에서 그를 한 단락으로 표현한 부분.

 

  ‘호치민은 빈틈없는 전략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재능 있는 조직가로서,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였다. 그는 현대 베트남의 역사에서 중심을 이루는 두 가지 힘을 자신의 내부에 결합하고 있었다. 그 힘이란 민족 독립의 요구와 사회경제적인 정의의 추구였다. 그가 그의 민족에게 남긴 유산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든 호치민은 전 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렬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 호치민 영묘(위), 바딘 광장(아래)

 

□ 호치민 영묘와 바딘 광장

 

  아침에 문을 여는 시간을 기다려 여느 관광객과는 다른 곳에 줄을 섰다. 안내인의 말로는 우리를 문화부 장관급으로 국빈 대우한다고 했으나, 일반 관광객처럼 카메라나 물품은 지참을 못하게 했다. 호치민의 묘는 연꽃의 모습을 따 설계했다고 하며, 앞 광장에 베트남의 국기인 황성적기가 펄럭이고, 영묘 왼쪽에는 ‘사회주의여 영원하라’, 오른쪽으로 ‘주석 호치민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중국 베이징을 여행할 때 천안문 광장에 안치된 마우쩌둥(毛澤東)의 시신을 보았던 터라 크게 기대는 걸지 않았으나, 엄숙한 경계와 분위기 속에서 본 호 주석의 시신은 조명의 힘인진 몰라도 어떤 신비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우쩌둥도 그랬지만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국토에 나누어 뿌려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붉은광장의 레닌 영묘에서처럼 약품 처리해 모신 뒤 인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회주의적 전통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떻든 베트남 인민들이 땡볕에 오랫동안 줄을 서 기다리면서까지 끊임없이 참배하면서 ‘힘없는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고 통일을 이루게 하신 분’으로 추앙하고, 이들을 결집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했다. 이번에 우리들을 특별히 안내해주신 분은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북한 김책공업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비엣 선생이다.

 

  바딘 광장은 바로 영묘 옆에 자리해 있었는데,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한 곳으로 베트남인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1887년 인도차이나 반도가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시작된 압제가 일본의 지배까지 이어지면서 실로 58년 만에 이루어진 독립이었으니 오죽했을 것인가? 바딘 광장 일대는 한쪽에는 호치민 영묘와 그가 생전에 기거했던 곳 등이 있고, 널따란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으로는 인민의사당 같은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광장은 3만5천ha나 되는 면적을 가진 곳으로, 경축일에는 광장과 주변 잔디밭에서 군사퍼레이드나 각종 축하행사가 벌어진다. 그리고 영묘와 광장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레닌 묘와 붉은 광장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한다.

 

                                                              * 호 주석이 기거했던 곳과 사무실 등

 

□ 호치민 주석궁과 주거지

 

  바딘 광장에서 영묘 쪽으로 들어서니, 황금빛 찬란한 주석궁 정문이 나온다. 안내자의 설명으로는, 프랑스 식민 통치 당시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하고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인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의 사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시키고 이를 접수해 주석궁으로 사용할 것을 권유했으나 호 주석이 거부하면서 국빈 방문시 접견실로, 또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회의실로 사용된다고 하니, 호 주석의 서민적인 기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안으로 들어간 곳에 호주석이 1958년부터 11년 동안 기거했던 2층 건물과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 등이 있었다. 임시건물처럼 생긴 2층 건물은 2평 침실과 2평 서재로 된 2층과 4평의 1층 집무실로 되어있다. 호 주석은 사람이 가족을 부양하게 되면 사심(私心)이 생기기 때문에 자신은 베트남과 결혼했다고 공공연히 말하며,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거처는 좁지만 정원은 3만 평이라고 했다.

 

  집 앞의 큰 연못은 호주석이 살아생전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고기가 한가롭게 노는 모습을 보며 망중한을 즐겼던 곳이라 한다. 아직도 분수가 활기차게 솟고 커다란 비단잉어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베트남 인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그 밑바탕에는 그의 소박한 성품과 청빈한 삶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철이 들면서부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가족을 잊은 채로 헌신했고, 전쟁 중에 돌아가셨기에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돌아다니며 간편한 생활에 익숙해져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멀리 했으리라.

 

                                                                                * 호 주석 요리사 당반러

 

□ 호 주석 요리사 당 반 러와의 만남

 

  호주석은 검소하기로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먹는 것도 당연히 그랬다고 한다. 이번에 우리 일행은 특별히 1960년부터 1969년 돌아가실 때까지 호 주석의 요리를 직접 담당했던 당 반 러(Ðᾰng Vᾰn Lό)를 만나 주석이 좋아했던 식성과 식단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쪽 귀는 잘 안 들렸으나 86세의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와 문답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호 주석은 소식가였던 만큼 간소한 식사를 하셨다. 채소인 경우 삶아서 간장에 찍어 드셨고, 쇠고기는 비프스테이크 형태 즉 마늘 양념에 소스를 발라 살짝 구워낸 것을 즐기셨다. 생선인 경우 가자미를 좋아하셨는데, 튀김을 주로 했다. 말년에는 호주석이 연세가 많으시고 건강이 안 좋으셔서 돼지고기는 비계를 제거하고 간장에 졸여 압축시킨 장조림 형태로 잡수셨다. 그것은 매우 담백해서 자신이 먹어봐도 맛이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9시경에 커피를 드셨고, 10시에는 건강을 생각하셔서 한국 인삼차를 드렸으며,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에 점심을 드셨다. 오후 2시 30분쯤에 밀크 커피를 만들어 드렸고, 4시쯤 다시 한 번 인삼차를 드신 다음, 5시 30분에 저녁을 드셨다. 9시 30분 취침 전에는 꼭 우유를 드렸다.

 

  아침 식사를 할 때는 빵에 소시지를 껴서 먹거나 닭고기 볶음밥을 먹는데, 커피와 함께 간단하게 드신다. 점심에는 기본적으로 1식 1찬을 지켜 밥, 국, 찬 하나씩을 드시며, 그 찬은 생선, 고기, 채소 중 그때그때 주문한 것을 드렸다.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외국 원수나 국가적인 손님 등 귀빈이 오시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미리 물어다가 직접 오셔서 주문을 하신다. 당시는 전시(戰時)라 정치부(14~15명이 모여 정책 결정) 모임이 많았는데, 국수나 베트남식 만둣국 등으로 간소하게 점심을 차리게 했다.

 

  자신은 시골 깡촌(?) 출신으로 호주석의 부름을 받게 되어서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서 만나 보니, 뭐든 격의 없이 물어볼 수도 있고 가족 같은 분위기여서, 괜한 걱정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자신이 섬세한 부분이 있어서 주석을 위해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다고 본다.

 

 

문 : 주석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었는가?

답 : 1찬 중심이니까 고기, 생선, 채소 등 골고루 나갔는데, 특히 돼지 머리고기를 좋아하시나 많이는 못 드셨다. 손님 올 때마다 그에 맞춰 나갈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문 : 우리나라 ○○대통령은 ○○ 양주를 즐기셨는데, 주석께서는 어떤 술을 좋아하셨나?

답 : 건강 때문에 술을 많이 드시진 못하였다. 식사 때 1잔 정도 마셨는데, 프랑스산 화이트와인이었다.

 

문 : 어떻게 해서 호 주석을 만나게 되었나?

답 : 나는 1949년에 입대했는데, 부대에는 중국 군사고문단이 와 있어서 거기서 그 분들이 드실 요리를 선임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부대에 자주 출입하던 호 주석께서 자신이 한 요리를 가끔 잡수셨으나, 서로 아는 척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에 읍면 단위로 주석을 위한 요리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전쟁 중이어서 적이 주석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때라 독을 타거나 해치려 들 수가 있으므로 아무래도 보안을 중시해 입이 무겁고 섬세한 나를 선택한 것 같다.

 

문 : 주석의 식성은?

답 : 매우 서민적이었다. 그래서 풍족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신경 썼던 부분이 있었다면 건강과 연세를 위한 배려였다. 닭고기를 선택할 때는 부드러운 걸 골라 푹 고아서 그 국물을 고기 위에 끼얹으면 소금을 찍어 드셨다. 채소는 베트남 식탁에 자주 오르는 콩나물 비슷한 숙주나물 같이 저렴한 나물을 볶아 드시는 걸 좋아하셨다. 생선 요리도 따로 하지 않고, 서민들이 먹는 식으로 그냥 국을 끓여 드셨다.

 

문 : 주석이 지방 출장을 가실 때면 따라가서 요리를 하셨는지?

답 : 내가 따라다니며 요리한 적은 없었다. 전시이기도 했지만 지방에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해 빨리 다녔다. 원거리는 비행기를 이용하고, 단거리는 차를 이용해 그 지역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당일에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초창기 어느 지역에 갔을 때 주석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숟가락도 대지 않았으므로 그 다음부터는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도시락은 찬합에 준비했는데, 깨소금을 넣은 주먹밥 하나와 국을 챙겼다. 커피를 내려 미리 설탕을 넣은 것을 병에 꼭 넣어 보냈고, 연유는 뜨거운 물과 같이 가지고 다니셨다.

 

문 : 식사 주문은 어떻게 하시는지?

답 : 그 당시 호주석은 매우 바빴지만 누구를 시키지 않고, 직접 주방에 오셔서 손님을 위해 주문했는데, 너무 많은 양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지방에 가실 때면 가끔 도시락을 챙겨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지역에 가서 간부나 관리가 함께 식사하면서도 자신의 도시락만 드신다. 이동 중에 점심을 드시는 경우는 비닐 장판 하나 깔아놓고, 사람들과 둘러앉아 도시락을 드셨다.

 

문 : 식당에는 몇 사람이 근무했나?

답 : 주석이 소박하기도 했지만 식당에는 2명이서 일했다. 최고의 청결을 바랐고 위생을 철저히 하라고 요구해서 요리사의 복장, 손, 머리 등을 철저히 검사하였다. 그리고 담당자를 두고 매일 음식에 독이 들어갔는지 확인하도록 하였다. 사실 그 때는 전시라 주방에 인력을 많이 보충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1명이 수행해버리면 나머지 1명이 혼자서 식사를 담당했고, 식자재는 공안 쪽에서 관리하여 들여보냈다.

 

                                                                            * 베트남식 찐빵 반바오

 

  문답이 끝나고, 박물관 측에서는 우리들에게 호주석이 즐겨 먹었다는 베트남식 찐빵 반바오와 커피를 대접했고, 중간 통역을 맡은 박물관 요원이 호 주석의 책 읽는 습관과 외국어 사용에 대한 얘기가 덧붙여졌다. 내용인즉, 독서를 즐겨 했는데 읽었던 책은 책꽂이에 두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바로 주었으며, 그것이 나라에 필요한 내용일 경우 담당자를 불러 내용 설명과 함께 주었다. 호 주석은 베트남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해 외국 방송을 직접 청취하여 중요한 정보를 체크해주었다 한다.

 

 

□ 나오면서

 

  이번 2시간여의 바딘광장과 호 주석 주거지 등의 방문은 우리들에게 이념이라는 잣대를 버리고 한 인물에 대한 탐구의 시간을 가지게 했다. 그가 젊은 시절에 다산의 ‘목민심서’에 심취해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족을 구하고자 나섰던 지도자의 길은 외롭고 험난했을 것이다. 자신의 영달이나 가족까지 버리고 오로지 민족과 나라만을 생각하고, 근면 검소를 몸소 실천했던 그의 발자취를 생생한 증언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겐 행운의 시간이었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어 보면, 호 주석은 일찍이 파리로 건너가 요리사 보조로 있다가 프랑스 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모스코바로 가서 공부한 후 1930년 베트남공산당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는 1945년 8월 이후 하노이를 접수한 후, 1975년 4월 30일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까지 30년간의 긴 전쟁의 대부분을 이끈 베트남 사람들의 영웅이다.

 

  호 주석은 인간해방을 열망한 공산주의자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지치지 않고 투쟁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앞서 말한 듀이커는 그의 저서 <호치민 평전>은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 베이징, 워싱턴과 끈질기게 협상함과 동시에 이 세 강대국의 반목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과정을 밀도 높게 재구성하고 있다. 철저한 조사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도 매혹적인 이 평전은 우리 시대의 가장 우뚝하고 신비스러운 인물, 영감과 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계시적인 초상화에 비유했다.

 

  호 주석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으나,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면서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국민에게 두고두고 칭송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친절한 ‘호 아저씨’로 남으리라.

 

                                                   *호 주석이 좋아했던 연못(위과) 집무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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