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강좌가 시작되고 첫 산행일.
장마 중이라, 전날 밤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이런 경우를 처음 맞는 수강생 중 일부는
무척 걱정을 하면서 밤잠을 설치고 나왔다.
강좌가 늦게 시작되는 바람에
철늦게 봄 들꽃 공부하러 가는 날,
다행히도 비는 멈추고
대신 폭풍급 바람이 분다.
차에서 내려 오름 초입에서
뜬금없는 어성초 꽃을 만나고
중간에 까치수영을 만났다.
잘 정리된 산책길로 높은오름에 올랐는데
바람이 세었지만 땀흘려 오른 이들에게는
폐부 깊숙이 식혀줘 상쾌함만 더하는데
이런 경험 처음이라는 한 아줌마
그래야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 된다는 말에
수줍게 미소로 답한다.
시종 즐거움으로 제제거리는 산행
거미오름에서 노란 한우 떼를 바라보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눈다.
바람 때문에
피라미드 같은 산체를 허리로 돌아 내려와
출발점으로 오는데
갑자기 장마 속에 내비치는 파란하늘과 구름….
♧ 장마와 어머니 - 신지혜
여러 갈래의 몸으로 서있다 어머니 잿빛 치마폭 같은 바람 속, 줄무늬눈물 서있다 때로 어머니 구멍 난 가슴 열쇠처럼 햇살 꽂힐 때까지, 어머니 주룩 주룩 무너진다 세상을 덮는 비애의 조각조각 꿰매진 일명 퀼트, 바느질 가게에도 빗줄기 여윈 다리를 꺾어 문턱을 넘는다 어둠이 딱딱하여 부술 수 없는 밤에는 어머니, 낡은 상처 한 장씩 꺼내 안감과 속감 두텁게 누비며 탈주의 길을 만든다 길 안과 밖, 무겁고 은밀한 기억까지
저 아득한 하늘 어떻게 다 가둘 수 있을까 이불 위로 삐뚤삐뚤 절망의 실이 풀린다 저잣거리 잡상인으로 머리칼 다 빠지도록, 생목숨 둥글려 만든 똬리위에 무거운 근심을 얹고 또 그 위에 허공을 얹고 어머니, 허리춤에 매달린 전대 속에서 묵직한 어둠이 절랑거리고 허기처럼 솥뚜껑을 두들기는 한여름 기인 장마, 生의 장작불이 생각의 조각조각을 태워버리면 빗속에 흩어지는 風磬풍경소리처럼 번져가는 물방울의 시간
어머니 각진 시간들 모아 모서리를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싯푸른 강 하나 바늘귀를 통과한다 어머니 발자국 지워가는 물줄기, 낡은 지붕 처마 끝에 매달려 환히 빛나는 수천의 몸들. 은뿌리 서 있다
♧ 장마예보 - 김수우
표시나지 않게 웃는다 복숭뼈에 튀는 빗방울. 우산을 접었다 꽃이 두근거린다 아니 두근대는 건 꽃을 안은 가슴, 우산을 폈다 문방구에 들러 두꺼운 노트를 산다. 일기를 새로 쓸 거야. 우산을 접었다 잎차 향기가 들새의 눈물처럼 흔들린다. 우산을 폈다 수화기를 들고 물안개 목소리로 안부를 전한다. 깨어진 유리컵. 우산을 접었다 맹꽁이 울음이 심심한데 빈 의자 같은 얼굴 하나. 우산을 폈다 철조망 감아오른 호박 줄기 그 손짓에 속살대는 개망초. 우산을 접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미워한다. 뱀딸기 같은 몽상의 파편. 우산을 폈다 코끝이 시리다 오늘부터 장마래지 뭉게구름처럼 사치스러울 수 있을 거야. 타박거리며 현관문에 키를 꽂다가 어머나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렸어.
♧ 장마철 여행 떠나기 - 목필균
며칠을 두들겨대던 빗줄기 끝에
장마는 잠시 틈을 내어 쉬고 있었다.
밤새
길 떠날 이의 가슴엔 빗소리로 엉겨든
불안한 징조가 떠나질 않더니
설핏 잦아든 빗소리가 반가워
배낭을 메고 나선다.
차창에 비치는 산야는 물안개에 잠겨
그윽한데
강줄기에 넘치는 듯 시뻘건 황토 물이
맑고 고요한 물보다 격정을 더하게 한다.
수많은 토사물이 뒤섞여 흘러가는 강물
그 속에 일상의 찌꺼기도 던져 보낸다.
미련 없이.
♧ 장마일기 - 임두고
무엇이 그리워
그대는 그렇게 열병을 앓고 있나요
마냥 수박 속 같은 기쁨으로
영글 줄 알았는데
강둑 위에 널린 빛바랜 꿈들을
속속들이 삼키며
우루루우루루 수화로 흔들리는 시야
내 심장의 부싯돌마저 젖고 있어요
사방은 온통 그대 부피로 밀폐되지만
그 안에 가슴 아픈 사랑의 공명은 빗소리
가닥가닥 땅의 건반을 두드리는
그대 여윈 손가락의 자유는 무엇을 그리워하나요
그대 노랫가락이 길고 깊어질수록
그림자마저 잃은 고독으로 낱낱이 흔들리며
힘없이 주저앉는 아랫도리들
나도, 뼈마디마저 흥건히 젖은 채
사랑을 달래고 싶어요
각혈로 쏟아지며
끝내 그대 열병은 씻겨 갔지만
서걱이는 물풀들이
팍팍한 모래알들이
그리움의 생채기로 남아 있어요
가만히 들어 보고
가만히 만져 봐요
암처럼 돋아 있는 사랑의 밀어를
♧ 장마 끝 산행 - 김길남
장마 뒤 끝이라
표범폭포 밑 계곡이 범람하다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아
신발을 초혜로 갈아 신고
기우뚱 거리며 계곡을 건넌다
발 위로 듬직한
바윗돌이 굴러 감을 느낀다
태양은 생명의 햇빛을
내리 쬐어 주었다
구름은 푸른 하늘을 화폭 삼아
추상화를 그리고
이름 모를 산새는
발랄하게 지저귀며
푸른 나무 사이로 날아간다
한가로운 새 소리가
테레빈유 소나무 향기와
같이 춤을 춘다
야생화가 파르르 흔들렸다
꽃 위에 앉아 있던 점박이 나비가
근처를 한 바퀴 사뿐 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용의 비늘은 갑옷을 입은
울긋불긋 적송의 뿌리는
땅을 박차고 나와
승천을 하려는지 폼을 잡고 있다
시야가 너무 맑아
동북쪽으로
금강산 내금강 산줄기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여
두 발을 높이 들고
그냥 손을 내밀었더니
설잡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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