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태풍 '차바'는 물러가고

김창집 2016. 10. 5. 11:56


태풍은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어제 밤은 시내 외곽지에 사는 동생네 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자정쯤 귀가하면서 벌써 그 위력을 느꼈습니다.

 

새벽에 TV 케이블선과 전기가 끊기더니

지금은 전기가 오는 대신 수돗물이 안 나옵니다.

     

새벽엔 시내 일부 하천변의 주민들을 대피시켰고

하천 인근에 세워놓은 차가 물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태풍 특보가 12시에 해제되면 항공 운항이 재개되어

어제 42편이 결항되어 발 묶였던 6500여명의 승객이

귀향하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햇볕도 수줍게 내려쬐고

온 동네가 조용합니다.

 

전에 찍었던 서귀포 보목동 앞바다 등의 파도 사진과 함께

태풍에 관한 시를 골라 옮겨 봅니다.

     

 

태풍 - 임영준


방종의 여름이 꺼지고

소인배들의 욕심이

극을 달리고

반도가 쓰레기로 넘칠 때

 

근간을 이루던 동량들이

조국을 미련 없이 떠나고

노인들의 한숨소리가

골목마다 메아리될 때

 

위정자들의

밥그릇 싸움이

일간지마다 넘치고

향학의 열망으로

분초를 아껴쓰던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어 헤멜 때쯤

 

태평양에서

철퇴가 날아온다

 

변화를 요구하고

모두 쓸어버리려 하고

단합해 버티라하고

해마다 나라를 다시

생각케 한다

     

 

태풍의 지문 - 박종인

 

바람의 악력握力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허공에 찍어대던 지문을 나무에게 찍다니,

그때 인주 묻은 바람의 엄지손가락을 보았다

바람의 지장指章이 집과 사람에게도 찍혔다고

아침부터 뉴스가 소란했다

매미라는 바람이 지나갔다

그녀의 이동경로를 눈치챘지만 아무도 차단하지 못했다

, 건드린 베란다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그 지문을 지우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웃집 부부는 늘 미풍이었다

그 웃음속에 태풍이 숨어있었다

남자에게 뛰어든 바람이 빠지기도 전

이혼이라는 지문을 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태풍 - 권오범

 

바다가 열 받아 낳은 외눈박이

영양가 많은 어미 체온 먹고 거리낌 없이 자라

어미 뱃가죽 출렁이게 짓밟고 회오리치는

불효막심한 것

 

비구름 끌어안고 성숙해지면

힘 주체 못해 몸부림치다

뭍에 올라

파괴본능 드러내놓고 천방지축

 

종요로운 다리 잘라 팽개치고

산허리, 냇둑, 길 예저기 베어 먹은 지난 상처

아물지 못해 벌겋게 덧났건만

다시 넘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몹쓸 것

 

온난화와 정분나

다산 소문 파다한 바다

심심하면 쑥대밭 만들러 올 고집불통 등쌀을

억겁의 붙박이 바위인들 어떻게 버티랴

     

 

 

태풍 - 홍일표

 

   독수리, 독수리떼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삶의 덩어리들 머리채 휘어잡아 날려버린다 뒤집어버린다 지상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전후좌우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가 마뜩찮은지 어지러이 흐트려놓는다 난동이다 야생의 거친 짐승이다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유리창의 차가운 가슴을 부수고, 자리 한 번 옮길 줄 모르는 소나무의 외고집을 뿌리째 뽑아던진다 항아리의 숨통을 막고 있는, 무거운 모자 뚜껑이 날아가고, 허명으로 번쩍이던 거리의 간판도 한순간 떨어져 부서진다 수천 리 질주하던 바람이 자진하여 쓰러진 지상의 한켠, 하늘에 새로 돋은 별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폐허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태풍이 지난 자리 - 최홍윤

 

심술궂은 비바람은

앙상한 가지에다,

보기 흉한 여인네의 고쟁이를 걸어놓고

 

황토 물은

보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헌 고무신짝을

사정없이 세차게 밀어 낸다

 

동해 바다 너울 파도,

수족관에 노닐던 물고기를

영원한 고향으로 돌려보내던 날에

 

철모르고

철부지하게 웃다 녹초가 된 가을꽃을

획 삼키고 달아난 가혹한 비바람이여

 

그러다가

능청스럽게 잔잔한 저 바다가 야속하고,

 

햇빛 머금고

헤프게 나뭇잎 헹구는 저 강물도 얄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