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김영미 시집 '물들다'의 시들

김창집 2016. 10. 29. 00:05



흔적

 

오래 전,

액자를 걸기 위해

박았던 못의 자리

액자는 언제 내려졌는지

기억이 없고

액자를 걸려고

박았던 못도

온데간데없는데

구멍 난 그 자리

녹이 슨 흔적은

선연히 남아있어

 

어느 날엔가

내 가슴에 박혔던

못의 자리

지금도 아파하듯이

너도 지금

아파하는지

 

상처는 상처로 남아

내가 얼마나

더 쓰러지고 더 아파해야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구멍 난 벽이

못의 슬픔을 알고

못이 구멍 난 벽의

아픔을 알 수 있을 때

우리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아픔을

만질 수 있으리

   

 

 

머귀나무

    -나의 아들에게

 

나 세상에 살던 묵은 흔적 지우면

내 아들은

누런 베옷을 입고 너를 짚고 서서

미련한 나를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 오직 어머니로만

단 한 순간도

소녀로 여자로 살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오로지 어머니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희디흰 어미란 이름으로

아들에게 오직 나의 아들에게

남겨지게 될 것이다

 

나의 아들은

머귀나무가 가시를 품기 위해

제 몸을 뚫고 나오는

상처를 얼마나 다독였는지

제 몸에 난 가시를 얼마나 매만졌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머귀나무 마디마다

아프게 새겨 올린

가시에 패인 상처는 보지 못하고

오직 너의 기억을 위해

어미가 가슴에 묻은 어미가 아니었던

이야기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겠지.

가시의 흔적은 말끔하게 지워졌지만

온몸이 모두 가시였던 날의

진실은 모른 채

새하얗게 빛바래진

머귀나무의 마디를 만지며

어미였던 것만 생각하겠지.

 

그런데 얘야, 머귀나무는

온몸을 가시로 빼곡히 채운 가시나무란다.

     

 

목말을 타다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갔다.

살았을 적에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해보지 못했는데

돌아가시니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황소 같던 어깨를 내리고 누운 자리에

고단한 수염처럼 돋아 오른 풀을 베어내다

아버지 몸 위에

터억 주저앉았다.

뜨겁다, 아버지의 목 언저리가 뜨겁다

아버지 나이가 된 내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아버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아버지의

헛헛한 웃음소리

적막한 묘지마을 속으로 스며들어

들리는 듯 마는 듯

두 눈에 담긴 먼 하늘은

자꾸만 흐려져 가물거리는데

 

작열하던 태양도 지친 오후

아버지와 어린아이가 되어 놀다가

아버지만 남겨두고

흥건해진 몸으로 돌아섰다.

그림자도 없는 아버지의 배웅이

오늘따라 길다.

     

 

 

배꼽

 

사자의 서에서 이르길

부모는 자신이 택한 길이란다

내 부모 되어 주십사

무릎 꿇어 청한 일이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어머니로 섬기겠다, 서약한 일이란다

태초의 먼지로 돌아들던 전생

수천, 수만 겁의 핏줄을 밟고

마침내 지울 수 없는 인연으로

확인받은 내 날숨의

첫 흔적

, 사랑, 생명, 인연 그리고 무수한 것들의

중심

깊고 까만 세상의 막막함을 지켜주던

고요한 숨소리가

아직도 달그락거리는 오늘

눈빛이 머물지 못하는 가없는 하늘

기억도 할 수 없는 저 먼 땅

우주의 숨결로부터 뼈와 살을 가져와

생의 기적을 터트린 탯줄

내가 당신을 온전하게 마주해야 할

, 하나의 이유

배꼽

   

 

 

수묵담채

 

고랑고랑 콧소리 내며 잠든

늙은 어미 손톱 밑이 검다

볕드는 현관에 바람 벗 삼아 앉아

굽은 등 수십 번 펴고 두드리며

고구마줄기를 벗기다 들었을

풀빛이 검다.

 

잠이 든 어미 곁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셋

희었다가 푸르다가 검어지던

가슴 아린 줄기들이 얼기설기

소복이 들어있다.

 

진종일 어미는 젊은 날의

가을 밥상을 차렸을 것이다.

구수한 된장과 버무려진

고구마 줄기나물의 순한 맛을

 

소슬한 바람너머로

보름밤을 하얗게 도려낸

가을 달빛이

고구마줄기처럼 휘었던

어미의 등을 주무르고 지나간다.

   

 

 

화엄 - 김영미

 

모든 것들의 절정은

 

끝났다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보라,

 

떨어져 누운 꽃들이

 

지상에 찍는

 

절정을

 

 

* 김영미 시집 물들다’(리토피아, 2016.)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산국(山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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