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
나무가 나무에 기대어
숲을 이루다
저희가 가진 것 없어 얽히어
온몸으로 내가 너다
소나무는 박달나무라는 이름으로
소나무다 소나무를
아무도 숲이라 하지 않는다
소나무로 하여
박달나무가 숲이다
그리하여 소나무는
숲이다 박달나무는
오리나무는 하다못해 찔레
나무는 상수리나무는
그래서 비로소 숲이다
만약 소나무가 박달나무로 하여
숲이 아니라면 이 숲 속의
그리움은 누구 것이냐
머리 위에 빛나는 하늘은
바위는 또 냇물은
무엇의 사랑이냐
숲 속 나무에 기대어
내게 지닌 것 모두
제 자리에 돌려주고
한 마리 순한 짐승으로
내가 숲이 된다
내가 숲이다 내가 너다
♧ 숲, 혹은 사랑에 관한 변주 1
-독초에게도 향이 있다
꽃이 피지 않아도 숲엔 향기가 있다
숲에 사는 가시투성이 엄나무는
다른 엄나무에게 보내는 향기가 있다
독초라고 부르는 풀잎에도 향기가 있다
그 풀잎에게 물어보라
독초라는 이름 대신
향기로운 이름이 있다
그것을 숲 속의 푸나무들은 그리움이라 부르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만났을 때
푸나무들엔 꽃이 핀다
그 때의 향기를 말해 무엇하랴
그것을 숲 속의 푸나무들은 사랑이라 부르는지 모른다
숲엔 언제나 숲의 향기가 있다.
♧ 겨울숲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은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 자작나무 숲의 자세
먼 나라 북쪽에 와서 자작나무 숲을 처음 보았다
때론 3미터도 넘게 쌓인다는 눈
자작나무도 지붕도 사람들의 어깨도 가파르다
저마다의 생이 갖고 있는 가파른 경사를 이해하기로 한다
자작나무숲은
그것이 무엇이든 쌓아두지 않는다
속살로 생을 건너가는 성자들처럼
다만 견딜 뿐 아니라 그 빛깔을 닮아버려서
벗은 살결조차 눈빛이다
이 나무의 족속을 우러러 올려다보아야하는 이유가 또 있다
천지사방에 길이 막혔을 때
하늘을 향하여 한사코 길을 내는 저 기도의 자세
-오직
이 길 끝에 한 줌 재도 연기도 남지 않기를
나지막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끔 이웃 가지를 흔들어 깨워주며
무거운 오호츠크 기단을 맞서는 흰 빛의 연대를 보았다
♧ 5월의 느티나무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이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 상수리나무 스승
이 마을 숲엔 몇 십 년 묵은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모여 산다
하나같이 허리께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상처가 있다
그 옛날 마을사람들 떡메를 지고 와서
나무둥치를 쳐올려 상수리를 땄기 때문이다
나무를 쳐댈 때마다
나무는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
쏟아 냈을 것이다
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
나무는 하늘로 더 멀리 가지를 뻗었을 것인데
그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썩어가는 둥치 속으론
버섯이 자라고
청개구리가 기어들고
또 풍뎅이가 알을 깐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나무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 혹은 노래 같은 것을
이것들의 입으로 날갯짓으로 들려주곤 하는데
내 살아갈 길을 넌지시 들려주는 것도 같은데
한 계절도 아니고
한 해로도 끝나지 않아서
아예 이 숲에 살림을 차려서 모시고도 싶다
♧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 새에 대한 반성문
춥고 쓸쓸함이 몽당빗자루 같은 날
운암댐 소롯길에 서서
날개소리 가득히 내리는 청둥오리떼 본다
혼자 보기는 아슴찬히 미안하여
그리운 그리운 이 그리며 본다
우리가 춥다고 버리고 싶은 세상에
내가 침 뱉고 오줌 내갈긴
그것도 살얼음 깔려드는 수면 위에
머언 먼 순은의 눈나라에서나 배웠음직한 몸짓이랑
카랑카랑 별빛 속에서 익혔음직한 목소리들을 풀어놓는
별, 별, 새, 새, 들, 을, 본다
물 속에 살며 물에 젖지 않는
얼음과 더불어 살며 얼지 않는 저 어린 날개들이
건너왔을 바다와 눈보라를 생각하며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생각하는데
물가의 진창에도 푹푹 빠지는
아, 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냐
내 관절통은 또 얼마나 호사스러운 것이냐
그리운 이여,
네 가슴에 못 박혀 삭고 싶은 속된 내 그리움은 또 얼마나
얕은 것이냐
한 무리의 새떼는 또
초승달에 결승문자 몇 개 그리며 가뭇없는
더 먼 길 떠난다 이 밤사
나는 옷을 더 벗어야겠구나
저 운암의 겨울새들의 행로를 보아버린 죄로
이 밤으로 돌아가
더 추워야겠다 나는
한껏 가난해져야겠다
* ‘산림문학’ 2017년 여름호(통권26호, 초대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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