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눈 속 아늑한 풍경을 찾아서

김창집 2018. 1. 30. 13:58


지난 겨울은 눈이 별로 안 내렸는데

이번 겨울은 일찍부터 눈 내리는 날이 이어져

자주 눈 속을 걷게 된다.

 

눈내린 풍경은 한결 같은 모습이지만

찍으면 그림이 될 것 같아

신나게 찍고 와도 마음에 차는 건 없다.

 

하여, 지난 일요일은 욕심 부리지 않고

돌 위에 쌓인 눈이

초가집처럼 보이는 걸 찾아보았다.

     

  

 

저 눈밭에 그리움을 묻고 - (宵火)고은영

 

어제의 꽃은 시들고

밤이면 불빛 따라 흐르지 못하는 어둠을 끌어안고

불구의 영혼으로 부르던 묵언의 외침들

패색 짙은 선로에 서면 허무만 팔랑대고……

 

삶의 한계를 절감하는 날은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이 더욱 아프다

아무리 울어도 외로움이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독은 면할 수 없다

 

저 눈밭에 그리움을 묻자

저 눈밭에 진저리치는 나의 상처를 묻자

저 눈밭에 어두운 나의 과거를 묻고

아픔을 묻고 나의 슬픈 눈물을 묻자

 

쉬지 않고 하루종일 내리는 눈

곁가지로 나풀대던 등 피로

영혼이 흔들리는 추위에 서서도

살아감은 욕망과 필요를 줄이며

그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 서지월

 

한번 들어보게나

바람이 불 때 말이지

나무의 나뭇가지들이 즐거운 비명 지르면서

놓아버린 새를 그리워할 때

봄은 오고

새잎 피워낸다는 사실을

거기 새론 음악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 뜨거운 피 데워지고

다시 잔을 들면 피어나는 꽃송이들 탐스럽지 않겠는가

햇빛 나고 달빛 나고 별빛 더해주지만

더러는 먹장구름 몰려 와 비 퍼부면서

너 가만 있거라 너 가만 있거라

물고문 은총 내리지만

그게 어디 사는 재미인가

진실로 우리가 우리 마음의

담도 뭉게고 감시와 철조망을 철거할 때

한껏 푸른 종소리 울려오겠지만

이웃간의 담이 높아질 때

찾아드는 겨울은 살벌하고

이처럼 우리가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시린 발도

시리지 않게 포근한 금잔디 노란 민들레의

어머니같은 그리움 갖자는 것이야

더러는 개개인 이익을 위해

외투 꺼내입고 혼자 포근한 척 하지만

생명이, 세상에 버려진 몸뚱아리가

가고 없으면 남는 것은

빈 집 뿐일세

콩깍지같이 단단한 쓸데없는 과욕일랑

헌신짝처럼 버리고

너 옷 벗으면 내 옷 벗듯

마음의 화장을 걷고 흥분하지 말고

천국을 향한 하나씩의 계단

아름답게 밟고 가는 잠깬 목동의

피리소리를 듣자는 것이야

 

 

 

눈밭에 서서 - 이향아    


벌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눈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흐느낌으로 세상을 파묻는다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하얗게 되어서 서늘히 식을 것이다

불길이 꽃밭처럼 이글거리다가

그을린 삭정이 검푸른 연기까지

끝내는 흰 재로 삭아내리 듯이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햇발 아래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과

이별을 흔들던 진아사 손수건

항복을 알리는 창백한 깃발과

핏기 없이 죽어가는 마지막 얼굴

눈은 자꾸만 오고

세상은 자꾸만 파묻히고 있다

 

지금은 찬연하여도

희게 희게 바래서 몰라보게 되면

비로소 끝이라는 걸 믿어도 될까

눈 덮힌 벌판을 바라보면

이미 심판이 끝난 것들이

눈발되어 차분히 내린다는 것을

황홀한 꿈에 잠긴 영혼들의 세상을

아주 가까이서 엿볼 수가 있다

   

 

 

슬픔은 하얀 눈밭 - 권경업


동짓달 그믐밤 어둠으로도

이 슬픈 가슴을 덮을 수 없다면

백두대간 위로 스러지는 잔별을 보며

새날을 기다리자

그래도 슬픔을 가눌 수 없다면

내 지나간 능선과

너 남겨놓은 계곡을

섬섬이 담아 지고

눈 덮히는 백두대간으로 가자

투명한 月鏡 안주 삼아

뿌려둔 추억을 취하도록 마시자면

슬픔은

하얀 눈밭 되어

백두대간에서 빛나리

........

*月鏡: 강원도 지방의 소주인 경월을 산사람들이 부르는 애칭.

     

 

눈길을 걸으며 - 강대실

 

 눈길을 나선다 입춘이 내일인데 길이란 길은 끝없이 흰 길로 통하고 금방 스친 이가 찍은 발자국까지 숨어버린 눈길 소록소록 걷는다 속에 사그라지다 남은 그리움 조각 눈 속에 빠끔히 고갤 내민다 추억이 서린 길 따라 걷는다 눈꽃으로 피워내며 이슥토록 걷는다 이 길 다 가고 나면 그리움 이울고 말겠지 어느새 가로등 하얀 빈 터에 기다려 서 있는 문 앞에 당도한다 툭툭 그리움 털어 낸다 눈물을 닦아낸다

   

 

 

누가 눈길 함부로 밟는가 - 박상건

 

숨 헐떡이는 정수리에 두 개의 바위

주목나무를 움켜쥐고 서 있다

가지마다 고드름의 속울음이 햇살로 반짝인다

앞산 뒷산 관음(觀音)하며 눈발이 내리고

하산하는 산길도 두 귀 놓지 못한 채

비워서 쌓이고 언 길 위에 상처 묻고 나면

제 살점으로 다독이고 눌러둔 즈믄 바위에

고드름 깨지는 소리

 

등덜미에 맺힌 땀방울 식히던 산허리께

여여한 가지마다 사리처럼 깨진 고드름이

환한 눈발 길을 밝히고

생각은 깊을수록 하늘 움찔대며 다시 내리는

바람소리 쏟뜨리는 눈길을

누가 함부로 밟는가

헌신의 눈 모종을 하는 이 눈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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