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산림문학' 여름호의 시들(2)

김창집 2018. 8. 20. 17:21


유난히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많은 올 여름은

한라산 가까운 숲속으로 많이 갔다.

 

생각 같아서는 더 깊숙한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한라산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생물권보존지역이라

그 아래서만 맴돌았다.

 

사람이 사는 동네선

섭씨 35°를 오르내린다고 아우성이지만

숲속에선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사람의 손에서 황폐된 산림은 사람의 손으로 복원해야 한다지만

자연림은 언제나 부담이 없어 홀가분하다.

 

산에 들어설 적마다 나무만 올려다 찍었는데

어제는 그 아래 움츠리고 있는 것들에 눈이 갔다.

   

 

산이 오는 소리 - 조병무

 

잠든 새벽안개를 보았는가

 

열려진 문틈 사이로

비쭉 바라보이는 바람과 함께

찾아온 기척

손짓하는 곳을 보았는가

 

하얗게 밀려오는 물안개 속에서

산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는가

 

미망의 걸음을 삼켜버린 듯

서서히 무너지듯

걸어오는 산자락을 보았는가

 

뻐꾸기 소리 잠잠히 잠재우며

물소리 깊은 명상으로 이끌 때

나뭇잎 흔들리는 후미진 골짝에 서 있는

신령이 나에게 오는 것을 보았는가

   

 

  

 

숲에서 - 김행숙

 

숲에 유월이 왔다

비에 부푼 나뭇잎들은

초록의 바다에 떠 있다

 

바람 따라 사위는 잠잠해 지고

숲이 품은 벌레들과 버섯들이

직선으로 햇볕을 받아 안노라면

 

여린 잎사귀 위에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 금빛 달팽이

 

우리는 주고받던 말을 멈추고

저녁 숲을 바라본다

 

유월의 숲은

무엇이든 감싸 안으려 한다

숲속에 둥지를 튼 새들은

끝없이 먹이를 나르고

 

우리가 미처 다 못한 말을

새가 노래로 부른다.     


 


나무의 소리 - 이명호

 

혹독하게 추운겨울이 물러가자

나무들이 기쁘서 손뼉을 친다.

겨우내 움츠린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일제히 야호를 외친다.

마주보는 앞산 봉우리가 크게 화답한다.

눈부신 고통속의 벅찬 환희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들 세상이다

나무들이 푸르게 소리친다.

푸르게 메아리친다.

연신 초록물결 파장이 온 산에 넘친다.

     

 

사랑아, 사람아 - 지은경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았더니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랍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다

한 사람의 사랑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랑아, 사람아

날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내 사랑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날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홍련 - 채들

 

외발로

비 맞고 서 있는

홍학이로구나

 

어느 질척한 인연으로

한 발 접어 가슴에 묻고

한 발 진흙에 푸욱 빠트린 채

저리 파닥이는가

 

날지도

머물지도 못하고

     

 

야생차 - 최금녀

 

지리산 자락에서는 차 끓이는 냄새가 난다

산 깊은 곳, 물 맑은 곳에서

야생차 한 잔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입안이 달아오른다

 

눈 쌓인 토치카에서 마주친 열일곱의 눈망울과

자욱한 피보라 계곡의 스케치가 목으로 넘어 간다

목에서 가슴으로 넘어간다

불길로 울먹이며 넘어간다

 

바람소리에 따끈한 물 부어 다시 우려내어

단번에 마시고 나면 바람은 어느새 달아나고

어디서 산새가 더 깊은 맛으로 운다

산새울음 잔에 남아 우러나고

 

이 겨울 지리산에서

저희들끼리 몸 비비는 바람소리 들으며

야생차 그 깊은 맛에 취해

산새와 단 둘이

한 잔 또 한 잔.

   

 

 

아버지의 날들 - 최상호

 

아버지는 하이에나였다

볼품없는 몸매 푸석하고 늘어진

갈기로

사자가 남긴 찌꺼기를 거두었다

 

그러나 때로는,

하찮은 먹이를 얻기 위해

사자에게도 덤벼들던

장엄한 전사였다

     

 

바람에 나무는 - 홍윤표

 

나무는 좌절할 줄 모른다

바람 불어도 눈비 내려도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수직으로 노래한다

좌절한다는 것은 긍정의 힘을 내려놓은 걸까

아니야, 나무도 살아가다 보면

힘들어 가지가 부러질 때가 있다

잘 자라라고 전지를 하고 거름을 주고

용기를 복돋워 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용기를 얻는 일

순간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나무여 잘 자라라

용기 내어 굳굳히 자라라

난 숲을 위하여

사랑하노라

 

 

                       * 시 : 산림문학2018년 여름(통권 30)에서

                          * 사진 : 어제 한라산 아래 숲에서 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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