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가을 들꽃을 기다리며

김창집 2018. 8. 24. 12:14


어제 처서(處暑)를 보내며

태풍 솔릭도 함께 보낸 제주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더워질 기세다.

 

그러나 계절은 속일 수 없어

가을 들꽃은 어김없이 피어나리니.

 

그래야 날씨도 기세를 꺾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찬바람을 내릴 터.

 

오늘은 가을을 기다리며

사진첩에서 가을 들꽃 사진을 꺼내본다.

   

 

 

산국향(山菊香) - 권경업


어서 나가 보거라

저기, 저어기

너희 큰고모님 오시나 보다

 

삽작 밖, 저문 돌담길

나를 업고 서성이던

! 누님의 귓볼 내음

   

 

 

해오라비난초 - 김승기


백로의 넋을 품고

그렇게도 날고 싶었을까

 

날아올라 봐야

무한허공

 

꽃으로 앉은

행복 뿌리칠 만큼

날아야 하는 이유 있을까

 

펼쳐든 날개깃

가슴 황홀히 눈부시지만

 

하얗게 찢어지는 몸부림

눈물겹다

   

 

 

용담꽃 - 홍해리(洪海里)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돌아와 서성이는 텅 빈 안마당에

스산히 마른 가슴만 홀로 서걱이는데

소리치며 달리던 초록빛 바람하며

이제와 불꽃 육신 스스로 태우는 산천

서리하늘 찬바람에 기러기 떠도

입 꼭꼭 다물고 떠나버린 사람아

달빛에 젖은 몸이 허기가 져서

너울너울 천지간에 흐늑이는데

잔치집 불빛처럼 화안히 피어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하리라*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

* 용담의 꽃말.

   

 

 

강아지풀에 대한 명상 - 신현정

 

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의 어린 영혼아

우리들은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해붙이기도 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영락없는 애늙은이였다

더 이상 자라지도 크지도 않는 고만고만한 애늙은이로 늙어야 했다

햇살에게든 바람에게든 강가이든 양지쪽에든 별 참견 다 해가면서

애늙은이로 늙었으면 좋을 뻔 했다

그래 그동안 안녕들 하셨는가 강아지풀아.

   

 

 

금꿩의다리 - 소양 김길자

 

산새들이 즐겨 노래하는

수목원에서

야리야리한 자줏빛다리가진

그녀를 만났다

 

누가 키웠을까

헌칠한 키에

다섯 폭 치마 힘껏 펼쳐 들고

꽃망울 터트리는 그 자태

 

고요가 흐르는 숲속에

보랏빛 꽃잎에 노랑꽃술로

아니,

노랑꽃술이 꽃술 아닌 꽃으로

자신을 지키며 피는 것을

바람은 알았을까

   

 

 

더덕꽃 - 심시인


고향집 울안에

더덕꽃이 피었다

한줄기에 더덕더덕 피었다

칠남매 둔 울 엄니 닮았다

   

 

 

나도송이풀 - 김윤현

 

가뭄이 들면

잎으로 슬픔을 말립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가지로 슬픔을 부러뜨립니다

 

서리 맵차게 내리면

열매로 슬픔을 떨어뜨립니다

 

혹한이 불어 닥치면

뿌리로 슬픔을 땅속에 묻습니다

 

나도송이풀은 슬퍼도 슬퍼하지 않다가

그 슬픔으로 다시 꽃을 피웁니다

   

 

가을이 익어갈 때면 - 松花 강봉환


길 섶 따라 풀벌레소리 귀 기우리며 걸어가다 보면

언제나 푸르를 것 같은 새파란 길 섶 잡초들 사이로

--둑 하는 소리에 나도 몰래 인기척에 놀라서

제 갈 길 바삐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참새 떼들


그중에는 아침마다 방울방울 이슬을 머금기도 하고

노을빛을 받아 금빛 찬란하게 하늘거리듯 맞이하며

은은하고 감동적인 가을에 정취를 알리는 수크령에

왠지 모를 설렘에 마음마저 빼앗기던 시절이 있었지


하염없이 걷는 산책길에 만나는 이름 모를 잡초들에

단연 돋보이듯 석양빛에 짙어져 가을을 알리던 서곡

그곳에 나 홀로 뽐내듯 우쭐대며 가을색이 돋보이고

가을을 알리려는 듯 솔솔 부는 바람에 하늘거리기만


그 옛날 풀을 매어 은혜를 갚는다는 풀, 수크령 군락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마저 생겨나게 한 낯익은 풀

이른 아침부터 모두 수크령 풀 섶에 묻혀 조잘거리듯

시끄럽게 쪼아대는 참새 떼에게 더 없는 먹이 감으로


가을은 이렇게 조용한 풀 섶 합창에 익어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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