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큰 비가 내리지 않아
타들어가던 농토,
올레길 걸으면서 가만이 살펴보니,
농심을 달래줄
태풍은 자꾸 비켜가기만 했다.
이번에 ‘솔릭’이 가까이 다가와
많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으니, 실컷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건들건들 넘어 가라.
강수량을 충분히 확보해서
두 달 동안 못 살게 굴었던 폭염까지 데려가고
서민들이랑 제발 울리지 마라.
그 동안 차라리 태풍이라도 몰려와
가뭄과 더위를 해소했으면 좋겠다던 민심을
외면하지 말기를….
♧ 태풍의 눈 - 이지엽
얼마나 외로우면 저렇게 몸부림치며 휘몰아치는 것일까요
북 태평양 그 먼 바다에서 아주 은밀히 태어나
고온다습한 공기를 끌어모으고
적운을 만들고 더 빠른 속도로 나선형 돌개로 변해
가로막는 모두를 날려보내고 오로지 뭍을 향해 돌진하는
저 고독한 사내의 그리움 덩어리
그 슬픈 눈, 유혹하지 마세요
지름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눈
불타는 적도의, 붉은 저 사랑의 눈!
아니 푸르고푸르고루르고 깊은 눈!
한 번 잡아당기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야성이 그에게는 있답니다
♧ 태풍의 눈 - 강민경
하나뿐인 눈으로는 사선을 그리는
대각의 세상을 다 보지 못한 한풀이였는가!
뱅글뱅글 지축을 흔드는 태풍
만물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수난이다
이 세상 누군들
살가운 바람으로 살고 싶지 않겠냐 만
세상에서 환영받고, 사랑받고, 싶은데
지글지글 끓는 지열이 목 마르다
바다에 파도는 뭍이 그리워 끝없이 출렁이고,
칭얼대는 말들이 버겁다고
하소연할 곳 없는 급하고 사나운 본성,
숨기지 못하는 외눈박이 태풍이니
뱅글뱅글 천방지축의 살벌함으로 돌고,
할퀴고, 때려 부수는 행패만 앞세우니
평화의 어제는 간 곳을 물어 낯설다
거덜 난 세간 살이 걱정에 잠 못 이룸이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닌데
고향 땅을 휩쓴 태풍 “차바”도,
미국 노스케롤라이를 강타한 “매슈”도
원근과 좌, 우, 구분 못하는
외눈박이의 짓거리라고 탓할 수만 없으니
아수라장이 된 세상 근심스런 그 틈으로,
깊어가는 가을 하늘 청명한 햇볕
한 걸음으로 달려와, 노여움으로 씩씩대는
폭풍의 눈,
부드러운 손들어 쓰다듬는다
근심 걱정은 잊고 잘 여물 가을 알곡 생각만 하자며
세상 다독이는 귀한 햇볕 따시디 따시다
♧ 태풍의 지문 - 박종인
바람의 악력握力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허공에 찍어대던 지문을 나무에게 찍다니,
그때 인주 묻은 바람의 엄지손가락을 보았다
바람의 지장指章이 집과 사람에게도 찍혔다고
아침부터 뉴스가 소란했다
매미라는 바람이 지나갔다
그녀의 이동경로를 눈치챘지만 아무도 차단하지 못했다
툭, 건드린 베란다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그 지문을 지우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웃집 부부는 늘 미풍이었다
그 웃음속에 태풍이 숨어있었다
남자에게 뛰어든 바람이 빠지기도 전
이혼이라는 지문을 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 태풍의 눈 - 강효수
오만과 교만으로 충만한 무지한 것들
열섬에 갇혀 거짓에 충실한 것들
고요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위해
나는 큰 춤을 추노라
기쁨은 슬픔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흐름을 거역한 왜곡을 위해 나는
거꾸로 돌며 돌며 진한 푸닥거리 하노라
내 숨소리는 거칠어도
내 춤사위는 세상을 뒤집어도
나는 큰 눈물 흘리노라
나의 눈은 정온하나니
나의 심장은 평화롭나니
너의 영혼을 위탁하지 말지어다
원망은 없어라 슬픔은 없어라
귀 열고 거친 숨소리를 들어라
느껴라
크게 눈 뜨고 거대한 흐름을 보아라
느껴라
들리지 않거든 보이지 않거든
죽은 심장 주물러 벌써 죽어 있음을 느껴라
내가 내가 아님을 느껴라
나의 눈은 정온하나니
나의 심장은 평화롭나니
나는 흐름에 충실한 흐름일지니
나는 이제 크로노스를 죽이노라
나는 다시 카이로스를 살리노라
나는 흐름의 평화로 눈 감으며
나의 눈은 온전한 질서로 소멸하나니
♧ 태풍 유감 - 오보영
제발
아무 흔적 남기지 말고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숨죽이고 있는 몇 시간이
마치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네 못된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라
혹여 네가 이전처럼 마구 할퀴고 지나가
여린 가슴에 큰 상처 남길까
염려함이라
♧ 태풍에게 - 청수 박태원
나비야
네가 밉기는 처음이다
민들레 아지랑이 속
맴돌던 날개 짓
이상한 바람을 타고 왔구나
광풍 속 숨어 오지 말고
땅 파는 아우네
농부 집 들리지 말고
훠이 훠이 가거라
너의 앙칼 한 손톱
살점 뚝뚝 떨어지니
몸서리 농익는다
작아져라, 작아져라
태풍아 작아져라
이 밤 쓰라린 흔적
문신 새기지 말고 가거라
잘 익은 열매 낙하 않도록
열매 가지새로
있듯 없듯 새어 가거라
♧ 태풍의 길 - 이지영
자연이 알아서
해주는 구나
빗줄기 쏟아지고
장마가 휩쓸고
질풍노도 뒤집히는 광란
자연이 알아서
길을 찾아 주는구나
산을 자르고
강 맥줄 함부로 꺽어
러브호텔에다 골프채 휘두르더니
길이 막히고 벼락을 맞는다
적조의 바다가 휩쓸려 간다
지구 생태 복제를 어찌 할 수 있나
아름다운 우리들의 강
깨끗한 물소리 찾아가자
새들아 꽃들아 살아 있는 것들아
길이 보이지 않을떄 길을 물으러 간다
너희들은 내가 몸부빌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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