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 태풍 ‘솔릭’이 몰고 온 비가
사라오름 분화구에 호수를 이루었다고
지인이 보내온 사진을 보며,
몇 년 전 태풍이 지나고 나서 찍은
사진을 꺼내봅니다.
여름의 한라산의 기후는 변화가 심해
순간 반짝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가도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거나
안개가 삽시간에 퍼져
온 산을 캄캄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올 때 조금이라도 안개가 걷히면 찍으려고
그냥 지나갔다가,
안개로 덮이어 못 찍었다면서
물인지 안개인지 모르는 사진도 곁들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일도 그런 것 같아요.
좀더 형편이 나아지면 해야지 하고 미루어버린 일들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그래, 조금 부족하더라도
치를 일은 그때그때 치르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마음의 호수 - 박동수
호수의 물결이 인다 해도
기슭에서 기슭이니
한 눈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
가슴속에 묻힌 마음이야
보이기도
헤아리기도 어려워
용암처럼 뜨거워지는 시간
가슴 속의 호수
깊인들 넓인들
뉘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어찌
호수만 넓다 하는가
♧ 호수 - 박인걸
호수에 오면 내 마음이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고향만큼이나 넉넉하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호수는 언제나 푸근하게
하늘과 구름과 산도 품는다.
산이 저토록 아름다운 건
호수에 몸을 담그기 때문이다.
사납게 뛰 놀던 바람도
호수에 이르면 순해 지지만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은
아직은 일렁거리고 있다.
호수에 나를 빠트리고
며칠만 잠겼다 다시 나오면
내 마음과 눈동자도
호수처럼 맑아질 것 같다.
♧ 호수로 가는 이유 - 김내식
공기의 움직임이 바람이라면
마음의 움직임은 근심인가
어찌 하루도 조그만 내 가슴이 고요하지 못하여
풍랑이 심한 날은 나도 모르게
한적한 호수를 찾아
수면을 바라본다
생각은 호수의 물결인가
잔물결의 표면에 비치는 미루나무는
흐려지고 굽어지며
하늘에 뜬 해와 달도 둥글지 못하여
바람의 파장 따라 이지러져
바르게 볼 수 없다
이윽고 호수에 바람이 잦아들면
고요하고 평온해지게 되며
거기에는 더 이상
파장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물가의 느티나무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고
그 가지에 앉은 작은 새가
눈에 보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지저귀는 소리
그것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감미로운 음악이 되어
혼탁한 나의 뇌리와 가슴
관통해 지나가면
비로소 세상이 아름답게
눈에 보인다
♧ 호수 - 문정희
이제야 알겠네
당신 왜 홀로 있는지를
손에는 검버섯 피고
눈 밑에
산 그림자 밀려온 후에야
손과 손이
뜨거이 닿아
한 송이 꽃을 피우고
봄에도 여름에도
강물 소리 가득하던 우리 사이
벅차오르던 숨결로
눈 맞추던 사랑
이제 호수 되어
먼 모랫벌로 밀려가 버린 것을
이제야 알겠네
물이 된 지금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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