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오른 - 김연미
데쳐진 청각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어쩌다 식탁에 오른 어머니의 그 입맛
비릿한 유년의 기억이 의자에 앉은 저녁
애써 지운 물기가 살강살강 씹힌다
오감에도 들지 못한 무미한 그리움
유전성 입맛을 하고 문득 나를 깨운다
어디까지 내려서야 살과 살을 부빌까
한 번도 건네지 못한 손끝을 접고 나면
초록색 가슴 안쪽이 흥건하게 젖는다.
♧ 무등이왓 - 김영란
콩 타작 뒷그루
싹이 튼 이삭 콩
손을 놓친 아이처럼
파르르 떨고 있다
6거리 뚫린 길 따라
좁혀오는 포위망
영문도 모르게
총부리에 숨져간
떠나간 마을 사람들
돌아올 줄 모르고
동짓날 딸아이 비명
애기동백
툭 진다
♧ 8월의 어리목 – 오영호
폭염을 짊어지고 어리목을 찾아왔다
참나무 숲 녹음이 흐린 넋을 깨우고
시원한 바람의 물결에 찌든 몸도 씻는다
숲 건너 숲을 깨는 호오익, 호오익
임 향한 단심인가 달래는 외로움인가
어리목 휘파람새가 띄우는 푸른 선율
♧ 단호박 – 이애자
때로는 흠집이 속을 더 여물게 하네
두들두들 상처에 딱지가 앉는 동안
저 열외 왜소한 몸집 칼 앞에 단호하네
♧ 제설차 – 조한일
일 년 중 대목이라야
한겨울 그것도 며칠
폭설이 아니래도
도둑눈 몇 번 내리면
올해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는 면할 텐데
도로를 점유하는
모진 눈 치우고 나면
밥값은 한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전일제
근무할 수 있는
동토(凍土)로 가고 싶다
*계간『제주작가』2019년 가을(통권66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한라구절초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11월호의 시와 참회나무 열매 (0) | 2019.11.13 |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와 산국 (0) | 2019.11.05 |
양순진 시집 '노란 환상통'의 시 (0) | 2019.10.29 |
홍해리 시인의 가을꽃 시편 (0) | 2019.10.26 |
김정숙 시집 '나뭇잎 비문' 2 (0) | 2019.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