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조들

김창집 2019. 11. 4. 10:27


 어쩌다 오른 - 김연미

 

데쳐진 청각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어쩌다 식탁에 오른 어머니의 그 입맛

 

비릿한 유년의 기억이 의자에 앉은 저녁

 

애써 지운 물기가 살강살강 씹힌다

 

오감에도 들지 못한 무미한 그리움

 

유전성 입맛을 하고 문득 나를 깨운다

 

어디까지 내려서야 살과 살을 부빌까

 

한 번도 건네지 못한 손끝을 접고 나면

 

초록색 가슴 안쪽이 흥건하게 젖는다.

    

 

 

무등이왓 - 김영란

 

콩 타작 뒷그루

싹이 튼 이삭 콩

손을 놓친 아이처럼

파르르 떨고 있다

6거리 뚫린 길 따라

좁혀오는 포위망

 

영문도 모르게

총부리에 숨져간

떠나간 마을 사람들

돌아올 줄 모르고

동짓날 딸아이 비명

애기동백

툭 진다

    

 

 

8월의 어리목 오영호

 

폭염을 짊어지고 어리목을 찾아왔다

 

참나무 숲 녹음이 흐린 넋을 깨우고

 

시원한 바람의 물결에 찌든 몸도 씻는다

 

숲 건너 숲을 깨는 호오익, 호오익

 

임 향한 단심인가 달래는 외로움인가

 

어리목 휘파람새가 띄우는 푸른 선율

    

 

 

단호박 이애자

 

때로는 흠집이 속을 더 여물게 하네

 

두들두들 상처에 딱지가 앉는 동안

 

저 열외 왜소한 몸집 칼 앞에 단호하네

    

 

 

제설차 조한일

 

일 년 중 대목이라야

한겨울 그것도 며칠

 

폭설이 아니래도

도둑눈 몇 번 내리면

 

올해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는 면할 텐데

 

도로를 점유하는

모진 눈 치우고 나면

 

밥값은 한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전일제

근무할 수 있는

동토(凍土)로 가고 싶다

 

 

         *계간제주작가2019년 가을(통권66)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한라구절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