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와 산국

김창집 2019. 11. 5. 11:09



가을 같은 나이에 정순영

 

가을 같은 나이에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임을

쓸쓸한 것이 아니라 호젓한 것임을

알게 되는 인생의 봉놋방에서

보름달처럼 만난 인연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면서

아쉬워 않기로 했다.

    

 

마지막 시조施助 - 김동호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을 작은 친구들

 

미생물들에게 이른다

 

順天의 내 살 맛있게 먹어라

 

혈색 고운 어부가 황혼의 해안에서

 

순해진 고기 맛있게 먹듯

    

 

 

물길을 혼자 간다 이영춘

 

네가 가야 할 길은 아득히 멀고 깊구나

강가 숲 속에서 우는 작은 새,

새들의 울음소리 서럽도록 맑은데

혼자 걸어가고 있는 네 뒷모습

어느 길목에 이르러야

등뼈 곧추세울 수 있을까

 

물길마다 지워진 네 이름 석자

갈피마다 얼룩진 네 발자국 갈색 무늬

목 늘여 우는 새들의 소리 흉내내며 간다

 

끼륵끼륵 허공을 울다 날개 꺾인

슬픈 새,

강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묻고

네 가는 길을 강물에게 다시 묻는다

    

 

툭에 대하여 - 김미외


,

잠시 후 고요

귀고리 한 짝이 없다

 

,

차 안 공간을 메운다

옆 좌석 발판에 브로치가 뒹군다

 

단절의 칼날로

매달림을 놓아버리게 하는

 

,

비루한 욕심의 질긴 하루에

툭의 칼날을 댄다

 

,

숨구멍이 열린다.

 

 


- 박용운

 

길에 버려진 못 하나

무심코 걷어찬다

발길질에 도르르 굴러가는 못을 보며 문득,

누군가의 무릎을 걷어찬 느낌

 

어디에서 빠져나와 길에 버려졌을까

찌그러지고 허리마저 굽었다

무언가를 물고 버티었을 시간이 온몸에 흔적으로 남았다

 

호된 망치에 맞으며

모서리를 잡고 틈을 메웠을 작은 못 하나

 

목수의 힘찬 못질 소리에 아침이 일어서고

세상은 허리를 펴고

언덕은 산이 되고

 

못이 빠져나간 자리는 얼마나 중심이 기울었을까

 

이제 알겠다

아궁이 재를 쓸어내고 재 묻은 못을 하나하나 고르던 아버지

망치로 두드려 펴던 그 못들이

세상의 무게에 휘어진

아버지의 등뼈였음을

 

한 됫박의 못을 모아

삐걱거리는 대문을 고치고 외양간을 고치고

기울어진 방문을 바로잡던 사랑의 노역

그 못질 소리에 우리의 키가 반듯해졌다

 

슬그머니 못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가 늘 그러셨듯이

    

 

자작나무 숲으로 - 마선숙

 

절 지장전

향이 탄다

 

향을 따라가면

자작나무 숲에 이른다

 

은발 영령들의 숲

 

막내 동생이 이승에서

자작나무를 좋아했던 건

지름길로 가는 자작나무 숲을 알았기 때문일까

 

저 자작나무 껍질은

하늘로 오르고 싶은 뱀 한 마리

묵은 허물의 잔해일까

그 발자국까지

 

바람결에 영혼들이 운다

으스스 합창한다

 

동생 그리우면

절 지장전 향을 따라

자작나무 숲으로 간다

    

 

홍시 - 이상욱

 

한로 지난 하늘에

초신성 여럿 걸렸네

 

머나먼 우주에도

바람이 부는지

 

느지막 가을 사이로

타오르는 별무리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끊은 지 십년이 넘었는데

오늘은 낮잠 속에서 새 세상 만난 듯

담배 피우는 나를 만났다

우주를 송두리째 한 모금에 빨아들여

맛나게 소용돌이치는 블랙홀

말머리성운이 갈기를 흩날리며 히히힝

아득한 성간星間을 내닫고 있었다

그 바람에 기침起枕하셨는지

어제 뵌 열암곡列岩谷 새갓골마애불님께서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으셨다

내가 입 안 가득 머금은 미련 땜에 어물어물

일어나실 인연이시라고 여쭙기도 전에

온 우주를 코딱지만 하게 뭉쳐 코앞에 두시고는

엎더지신 채 코를 다시 고신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날 테니

니 놈은 어여 담배 끊을 궁리나 하라는 듯……

입때까지 천년千年을 주무셔도 콧구멍조차 필요 없으신 분이니

입술을 옴쭉 하실 리 만무하건만

나는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배터리가 거덜 날 때까지 궁리를 하였다

디카를 조작하여 돌아 눕혀드릴까

그나저나 아까 담뱃불은 제대로 비벼 껐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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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 月刊우리201911월호(통권 37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