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1월호의 시와 참회나무 열매

김창집 2019. 11. 13. 15:35


[권두시] 마지막 地上에서 - 김현승

 

산 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地平線을 넘어갔다.

 

四方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어느 귀천歸天 - 정순영

 

하늘이 깊고 푸르른 날

사방의 나무들이 다 모여 믿고 회개하며 기도하던 날

나무의 잎사귀들이 서로의 가슴을 부비며 바람소리를 내던 날

부름의 소리를 듣고 훌쩍 떠나버린 아이의

남긴 그림자 곁에 앉아

속 깊이 흐르는 눈물의 강둑을 다독이고 있었네.

    

 

 

낮잠 한옥순

 

돋보기 내려놓고

눈감고 있으려니

어룽어룽 어렴풋이

낯선 문이 보이네

 

문 안 대청마루 끝에서

아버지가 손짓하시네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여쭈려 가려니

앞에 놓인 구름다리 아래로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네

 

너무도 아득하여 눈 떠보니

봄 햇살이 이마에 닿아

주름지게 하네

이제까지의

꿈인지 생시인지

한순간 낮잠 같네

    

 

 

당신 한 삽 강우현

 

백중 지나 감나무의 매미를 듣는다

 

온 몸을 살라 보내는

입술 부르튼 소리

 

소리에 젖어

녹슨 부삽으로 그리움의 불씨를 떠온다

 

한결 같이 뜨겁던

당신 한 삽

 

꿈결에 손을 놓쳐

축 처진

내 시간의 어깨를 치료하는 온도다

    

 

 

화계사의 겨울 - 마선숙

 

발 시린 겨울이

일주문 밖에 서성이네

 

마른 숲 껴안은 대웅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넓은 마당만 몰래 쳐다보다

복전함 속으로 쏘옥 들어가네

 

집을 갖지 못한 새들

어서 봄 되어 꽃 피라고 독경이 한창이고

얼음장 밑의 물소리는 재잘재잘 범종을 두들기네

 

탑 밑 이끼 속에 자란 버섯이

저녁노을처럼 가부좌하네

 

매서운 바람 소리에

가던 길 멈추고 기웃거리는 햇빛들

봄을 부르듯 목탁 치네

    

 

 

장 담그는 날 이상욱

 

통허리 장독 따라

검은 띠 고운 메주 열 짓고

 

짚불 피워 태우니

타는 건 독이지만 정화는 마음이다

 

차곡차곡 메주 쌓아

죽편 가로지르고

 

달이 춤추던 호수 옮겨오니

맑은 하늘 넘실댄다

 

숯과 빨간 고추 자맥질에

행여 길손이 엿볼까

 

하얀 천 곱게 근심을 동여매니

어머니 주름 한 가닥 선잠이 든다

    

 

 

버찌 전선용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 현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은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불 켜진 창 여연

 

재건축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마을은 죽은 듯 잠들었는데

내가 살던 집만은 잠들지 않고

밤늦도록 내 귀가를 기다리고 잇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내 냄새를 맡은 집이

멀리서부터 꼬리 치며 컹컹 짖는다

세상 소음 내려놓은 어머니는 자불고

집만 혼자 커다랗게 눈 뜬 채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덤처럼 어둠 떠받치고 선

빈집들 사이를 걸어

불 켜진 창으로 가는 길

땀 젖은 하루로 숨죽였던

심장이 발보다 먼저 뛴다

 

 

                      *月刊우리201911377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익어있는 참회나무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