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두시] 마지막 地上에서 - 김현승
산 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地平線을 넘어갔다.
四方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 어느 귀천歸天 - 정순영
하늘이 깊고 푸르른 날
사방의 나무들이 다 모여 믿고 회개하며 기도하던 날
나무의 잎사귀들이 서로의 가슴을 부비며 바람소리를 내던 날
부름의 소리를 듣고 훌쩍 떠나버린 아이의
남긴 그림자 곁에 앉아
속 깊이 흐르는 눈물의 강둑을 다독이고 있었네.
♧ 낮잠 – 한옥순
돋보기 내려놓고
눈감고 있으려니
어룽어룽 어렴풋이
낯선 문이 보이네
문 안 대청마루 끝에서
아버지가 손짓하시네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여쭈려 가려니
앞에 놓인 구름다리 아래로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네
너무도 아득하여 눈 떠보니
봄 햇살이 이마에 닿아
주름지게 하네
이제까지의 生이
꿈인지 생시인지
한순간 낮잠 같네
♧ 당신 한 삽 – 강우현
백중 지나 감나무의 매미를 듣는다
온 몸을 살라 보내는
입술 부르튼 소리
소리에 젖어
녹슨 부삽으로 그리움의 불씨를 떠온다
한결 같이 뜨겁던
당신 한 삽
꿈결에 손을 놓쳐
축 처진
내 시간의 어깨를 치료하는 온도다
♧ 화계사의 겨울 - 마선숙
발 시린 겨울이
일주문 밖에 서성이네
마른 숲 껴안은 대웅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넓은 마당만 몰래 쳐다보다
복전함 속으로 쏘옥 들어가네
집을 갖지 못한 새들
어서 봄 되어 꽃 피라고 독경이 한창이고
얼음장 밑의 물소리는 재잘재잘 범종을 두들기네
탑 밑 이끼 속에 자란 버섯이
저녁노을처럼 가부좌하네
매서운 바람 소리에
가던 길 멈추고 기웃거리는 햇빛들
봄을 부르듯 목탁 치네
♧ 장 담그는 날 – 이상욱
통허리 장독 따라
검은 띠 고운 메주 열 짓고
짚불 피워 태우니
타는 건 독이지만 정화는 마음이다
차곡차곡 메주 쌓아
죽편 가로지르고
달이 춤추던 호수 옮겨오니
맑은 하늘 넘실댄다
숯과 빨간 고추 자맥질에
행여 길손이 엿볼까
하얀 천 곱게 근심을 동여매니
어머니 주름 한 가닥 선잠이 든다
♧ 버찌 – 전선용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 현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은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 불 켜진 창 – 여연
재건축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마을은 죽은 듯 잠들었는데
내가 살던 집만은 잠들지 않고
밤늦도록 내 귀가를 기다리고 잇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내 냄새를 맡은 집이
멀리서부터 꼬리 치며 컹컹 짖는다
세상 소음 내려놓은 어머니는 자불고
집만 혼자 커다랗게 눈 뜬 채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덤처럼 어둠 떠받치고 선
빈집들 사이를 걸어
불 켜진 창으로 가는 길
땀 젖은 하루로 숨죽였던
심장이 발보다 먼저 뛴다
*月刊『우리詩』2019년 11월 377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익어있는 참회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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