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정국 시조 '난쟁이 휘파람 소리'

김창집 2019. 11. 20. 13:59


난쟁이 휘파람 소리 - 고정국

 

1

난세에 가솔 잃고 이리저리 빌어먹던

남원 쪽 폴개동산난쟁이 홍 씨 그가

세화리 어느 부잣집 말테우리 됐다지

 

중산간이 소개疏開되고 해안 성벽이 쌓이고도

말먹이 테우리는 겁도 없이 오고 갔지

혹시나, 무슨 죄?” 하며 다랑쉬를 오갔지

    

 

쇠먹이 물이 좋아, 마을 가운데 퐁낭이 좋아

그 아래 ᄌᆞᆫ못에는 물이 늘 고여 있어

테우리난쟁이 홍 씨도 이 나무를 벗했지

 

키 작고 가솔 없고 일자무식 반생에서

떠돌이 아픈 세상에 휘파람처럼 살았단다

원혼이 가득한 허공에 식솔들을 부르며

 

구곡간장 다 녹아든 바람소리 휘파람소리

다랑쉬꼭대기에서 파르르 풀잎이 떨고

아득히 오름 자락엔 조랑말이 울었지

    

 

휘파람 한 번 불면 테우리들 따라 불고

휘파람 두 번 불면 우마들이 따라 오고

바람도 귀를 세우고 억새들을 깨웠지

 

야트막 용눈이오름 물매화가 눈을 뜨고

억새밭 숨어 살던 노루들이 따라오고

하늘도 눈시울 붉히며 그 소리를 들었지

 

휘파람 높은 곳에 바람이 따라오듯

목청 좋은 사람에겐 슬픔이 따라왔지

어쩌나 난쟁이 홍 씨, 일이 오고 말았네

    

 

2

소개령 해제되고 테우리가 돌아왔지

맨 먼저 난쟁이 홍씨 ᄌᆞᆫ못가에 도착했지

그곳에 우마를 풀어 물 먹이고 있을 때

 

나이 든 팽나무가 그늘 넉넉히 내리면서

오가는 발길들의 쉼터노릇 했다는 곳에

난장이 휘파람소리가 피 냄새로 바뀌는,

 

문득 팽나무에 종이 한 장 붙어있었지

까막눈 난쟁이 홍 씨 그 글에는 아랑곳없이

종이로 담배를 말았네, 침을 곱게 바르며


 

담배를 붙여 물고 연기 길게 내뿜었지

그 연기 그늘 아래 한 운명이 풀리면서

한 다발 종이뭉치가 그를 반겨 웃었지

 

이 무슨 횡재인가, 이 무슨 재앙인가

앞가슴 단추를 풀어 삐라뭉치를 쑤셔넣었지

어쩐담! ‘폭도 용의자누명 쓰고 말았지

 

난쟁이 몸수색에 다량의 삐라가 발견됐지

토벌대 개머리판이 홍 씨 턱에 작열했지

코와 입 가슴과 허리엔 피가 낭자 했었지


 

핏물이 부각부각붉은 거품이 솟아나고

머리통이 터지면서 허연 뇌수가 쏟아지고

한쪽 눈 하늘로 뜨고 한쪽 눈을 감았지

 

나이 든 팽나무가 가랑잎을 떨구었지

ᄌᆞᆫ못의 물그림자에 붉은 빛이 번지면서

토벌대 군홧발 소리가 차츰 멀어져갔지

    

 

3

그로부터 육십 년 세월 소리 없이 흘러갔지

억새밭 깊은 곳에 숨어 숨어 살던 노루

아직도 피맺힌 울음 꺼욱, 꺼욱!” 운다지

 

사람이 모질구나, 참으로 모질구나

그때부터 등을 돌린 산새들도 노루들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바람에게 전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들꽃들은 다시 피고

간간이 피 섞인 울음 산짐승이 밤에 울고

월랑봉 달이 밝으면 부엉새가 운단다

 

휘파람 불지 마라 액운이 따라온다.”

사월의 추운 숲에 숨어 우는 휘파람새

난쟁이 휘파람 소리가 저리 간곡하다니

    

 

 

4

악보도 모르면서 천 곡조를 부르는 새

법을 모르고도 법 한번 어기지 않은

그대로 그의 노래엔 어긋남이 없으니

 

여기 이 스토리텔링난쟁이 휘파람 소리

가볍게 곡을 달아 통기타를 퉁기면서

다랑쉬연못가에서 노래하고 싶구나

 

테우리 휘파람에 난쟁이가 살아나서

둥기둥 둥기 둥둥” “호호휘익 휘휘휘힉

이 땅의 새와 짐승들 함께 놀아봤으면

    

 

이 땅이 아픈 만큼 울음소리 한숨소리

이 땅의 산천초목 저들만의 춤사위로

다랑쉬 ᄌᆞᆫ못을 깨워 덩실덩실 춤추자

 

다랑쉬억새 숲에 숨어 떨던 노루들아

추운 사월 나뭇가지에 혼자 울던 휘파람새야

한쪽 눈 하늘에 뜬 채 이승 뜨던 홍 씨여

 

아직도 잠 못 드는 초목들을 어쩔 거나

끝내 풀지 못할 한풀이를 또 어쩔거나

모여라 둥기둥 둥기둥밤을 한 번 새워보자

    

 

개머리판 내려찍던 그 군인도 내려오고

서울에서 삿대질 하던 이승만이도 내려오고

9연대 2연대 모두 철모 벗고 내려와서

 

죽은 자 죽인 자가 서로 얼굴 쓰다듬으며,

이승에 못 다 푼 가슴들을 쓰다듬으며

하늘에 용서를 빌며 사월 한 달을 울어나 보자

 

그때면 밤하늘에 잔별들이 내려오고

핏기 없는 얼굴빛으로 그 참상을 내려다보던

달님도 함께 내려와 사람에게 빌리라

 

둥기둥 둥기둥둥풀지 못한 산의 노래여

휘휘익 휘익 휘익불지 못한 휘파람이여

저만치 난장이 홍 씨가 눈물 씻고 있구나 (2013)

 

 

            *고정국 시조선집그리운 나주 평야(책만드는집,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