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雪)이 지나고 11월의 막바지,
들판을 장식하던 억새들도 이제
씨앗을 여물리고 허옇게 벌어져
하늬바람을 기다린다.
모처럼 기억해 펼쳐든
강덕환 시집 ‘생말타기’의 억새시편은
억새를 통해 제주 역사를 한껏 풀어내고 있었다.
고명철 교수도 ‘시 해설’에서
‘제주의 중산간 곳곳에 흩날리는 억새는 무녀의 칼춤이며, 제주의 부정한 것들에 맞서 봉기한 제주 여인의 분노이고, 일제 식민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과 소련의 냉전질서로 분단된 분단국가에 대한 제주 민중의 역사적 저항의 몸짓이고, 이 모든 것들의 맺힌 한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시인의 해방과 정념의 언어’라 했다.
♧ 억새 1
어둠을 택해야만 가느다랗게 울었다
어딜 가도 발에 채는 현무암, 그 틈새로
저린 오금 쫙 펴는 날
차라리 섬 전체로 마구 울어보자며
바다를 건너려다 문득
팔 벌려 가로막는 수평선
한라산 첫눈보다 먼저 달려와
그을린 섬을 씻어도
쓰러져 밟히고 일어서서 잘리는
허연 게거품의 슬픈 노동일지라
들도 없이 산이 되는
목 타는 비탈
바람에게 배운
그르럭 그르럭 솥 창을 긁는 허기진 노래가
강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백성이 되고
평화로 어우러져
드디어 열리는 이 땅의 개벽!
♧ 억새 2
칼춤을 춘다
밤을 사르는 무녀의 주술처럼
미쳐도 아주 미친 동작을 칼춤을 춘다
부끄러운 데를 가릴 것도 없이
강간당한 여자들이 일어섰다
은장도를 몸에 품어
우악스럽게 지켜온 순결
한바탕 숨비질로 호오이 호오이
세상 저편으로 뜨겁게 밀어내던 앙금
언제부턴가 치마를 걷어 올리는 역풍
누에 빛 알몸을 노략질할 때
손에 손에 생리대를 들고
깃발처럼 흔들고 있다
♧ 억새 3
수화(手話)로 살기가 땀이 나면
옷소매로 쓰윽 훔쳐 내버리고
질기기만 하면 다인 줄 아는
말 모르기 말잿삼촌
자리젓에 콩잎 쌈
어욱 어욱 뭉쳐 먹으며
무모하게 흔들리진 않을 거여
무모하게 흔들리진 않을 거여
열 번씩 열 번
백번을 맹세하다가도
눌러야 사는 맛이 나는 우리는
흔들린다 비틀거린다 휘어진다 꺾인다
♧ 억새 4
제주해협을 건너오는
우울한 시대의
갈기 달린 바람
풍랑에 떠밀려 씨앗 하나 내리고
밤잠 설친 푸숭숭한 기대
또 하나 뿌리 뻗으며
쫓기듯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
어디든 깃들어 못 살 리 없겠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기에
긴 목 빼어 연북(戀北)하며
자랑자랑 웡이자랑
역사를 재우고 백의로 종군하는
하, 여기는 유배일번지(流配一番地)
♧ 억새 5
절망은 쉽게 하는 게 아니여
씽씽 찬바람
온몸을 발겨 놓을지라도
품은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네, 칼을 버리게
용서하게 한 많은 세상
아물 곳은 아물어
피 흘림의 역사, 이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되네
연합군에 쫓기다 쫓기다
항파두성에 숨어
숫돌에 써억 써억 갈아온
복수의 칼
거둘 때가 되었네
달밤에 닫는 삼별초의
말발굽소리, 소리 지르지 않는
함성은 참았다 참았다
마지막 순간에 뱉어내는
긴 호흡 하얀 파닥임이어야 하네
♧ 억새 6
우리는 이미 토종이 아니다
어디서 흘러들어 온 장꾼들이
이 땅의 방언을 깔고 앉아 난장을 벌이며
남는 것은 하나 없고 밑지기만 한다는 적자시대
우리 경제의 집약지 오일시장
밀치는 사람들의 허전한 물결 속에
뒷전으로 쳐지지랑 말자고
활활 타오르는 혓바닥들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하루살이보다 나은 오일 따라지
언제 찢길지 모르지만
사는 습성에 민감해질 저물녘엔 왠지
빈 가슴을 두드리는 한잔의 눈물겨움
잡종일지도 모르는 우리는
어젯밤 꾸었던 꿈을
닷새 후에 걸리는 대목에나 기대한다
♧ 억새 7
이곳에서도 억새는 피더군, 방파제 부근
자꾸만 침몰하는 도시의 늪을 떠나
지하상가를 지나 탑동에 오면 몸부림으로
피는 억새야 땅에서만 살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파닥이는 비늘 틈서리에 비늘꽃
포말로 멍이 드는 파도꽃
아 아 그럴 때마다 밤 깊은 줄 모르게
더욱 흔들리는 생리
횟집에서 흐르는 가락 젓가락 가락
포장마차 아줌마 가락 가락지 가락
어느 후미진 응달엔들 가서 못 닿으랴
바람으로 가서 닿고 구름으로 가서 닿고
햇빛으로 사랑으로 가서 닿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우리는 대칭으로 흔들리는 걸
♧ 억새 8
당신에게 있어 가을은
주름살 하나 더 느는 계절
새벽 창문 빛에 쫓겨 깨어나서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생활
동문시장 한 귀퉁이에 헤쳐 놓으면
조반도 거른 허기쯤
국화빵 몇 개로 꾹꾹 눌러 죽이며
본전 아쉬운 시장바닥
닳으면 닳았지 더 불지 않는 돈을
앞에서 세고
침 퉷퉷 발라 거꾸로 또 새고
온종일 지켜 앉아
더러는 졸기도 하던 시간들을 거둬 이고
떨이도 주워 담아 질척이는 귀로(歸路)
이빨 돋을 자리가 간지러운
손주 녀석의 재롱을 감당하지 못해
구멍가게에 들러 눈깔사탕도 몇 개 산다
*강덕환 시집『생말타기』(리본시선 001.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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