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1.
한 편의 시는
칼과 같다.
잘못된 칼은 사람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좋은 칼은 사람을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다.
그게
한 편의 좋은 詩다.
2.
이제 더 처절히 고독해지자
더 즐겁게 집중 · 몰두하자
그리하여 내 삶을 살며
나의 시를 쓰자
그늘 없는 생은 깊이가 없다.
2020 봄을 기다리며
북한산 우이동 골짜기에서,
隱山 洪海里 적음.
* 이번 시집에는 80년대와 90년대에 쓴 작품들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제까지 낸 시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들을 이번에 넣어 숨통을 열어 주기로 했다.
♧ 정곡론正鵠論 - 홍해리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 시작 연습詩作鍊習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한 채
험난한 바다에서 흔들리다
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쓸쓸한 귀항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 물은 물리지 않는다
물은 왜 물리지 않는가
이빨로 깨물어도 어찌 물리지 않는가
빛도 없고 내도 없고 맛도 몸도 없는 물
아무리 마셔도 물리는 법이 없고
질리지 않는 것이 물이다
물은 사이가 없다
물과 물 사이에 무엇이 있어 사이를 지우는가
몸에 샘이 솟아 내가 되어 강에 이르고
마침내 바다에 닿아 하나가 된다
우주를 움직이는 것은 물의 힘이다
생명은 물로 비롯되어 물로써 바로 선다
꽃 본 나비이듯
물 본 기러기 어찌 그냥 지나겠는가
무릇 맛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물의 덕이다
맛이 없다는 물맛이 제일이다
그러니 물에 물 타는 짓은 하지 말 일이다
물은 제 맛을 버리지 않는다
너에게 스며드는 내 사랑이 그렇다.
- 시집『정곡론正鵠論』(2020, 도서출판 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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