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正鵠論'

김창집 2020. 2. 18. 09:49

 

♧ 시인의 말

 

1.

 

한 편의 시는

칼과 같다.

 

잘못된 칼은 사람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좋은 칼은 사람을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다.

 

그게

한 편의 좋은 詩다.

 

2.

 

이제 더 처절히 고독해지자

더 즐겁게 집중 · 몰두하자

그리하여 내 삶을 살며

나의 시를 쓰자

그늘 없는 생은 깊이가 없다.

 

 

             2020 봄을 기다리며

     북한산 우이동 골짜기에서,

                 隱山 洪海里 적음.

 

   * 이번 시집에는 80년대와 90년대에 쓴 작품들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제까지 낸 시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들을 이번에 넣어 숨통을 열어 주기로 했다.

 

 

♧ 정곡론正鵠論 - 홍해리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 시작 연습詩作鍊習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한 채

 

험난한 바다에서 흔들리다

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쓸쓸한 귀항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 물은 물리지 않는다

 

물은 왜 물리지 않는가

 

이빨로 깨물어도 어찌 물리지 않는가

빛도 없고 내도 없고 맛도 몸도 없는 물

아무리 마셔도 물리는 법이 없고

질리지 않는 것이 물이다

 

물은 사이가 없다

물과 물 사이에 무엇이 있어 사이를 지우는가

몸에 샘이 솟아 내가 되어 강에 이르고

마침내 바다에 닿아 하나가 된다

 

우주를 움직이는 것은 물의 힘이다

생명은 물로 비롯되어 물로써 바로 선다

꽃 본 나비이듯

물 본 기러기 어찌 그냥 지나겠는가

 

무릇 맛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물의 덕이다

맛이 없다는 물맛이 제일이다

그러니 물에 물 타는 짓은 하지 말 일이다

물은 제 맛을 버리지 않는다

 

너에게 스며드는 내 사랑이 그렇다.

 

 

                                              - 시집『정곡론正鵠論』(2020, 도서출판 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