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 속에
겨울바람 속에는 날카로운 솜방망이가 들어 있다
두억시니
어처구니
칼 찬 사내들 말발굽소리 대지를 가르지만
미나리꽝 얼음장 밑 푸른 미나리
살 오르는 소리 들어 보아라
봄바람 속에는 부드러운 칼이 들어 있으니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너
눈에 빠지며 엎어지며 불원천리 찾아왔다
기다린다는 것은
살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환장의 세월이었지
남은 겨울의 꼬리를 가차없이 잘라내려고
겨우내 부드럽게 칼을 갈았다
봄비는 조용히 울어 눈물로 겨울을 씻어내며
역습해 오는 꽃샘바람을 수비하기 위하여
비수를 가슴에 품는 것이니
봄바람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문자를 보라
봄이라고 봄바람 바람바람 불고 있다
여기저기 짙은 포연 속에
풍비박산한 세상이 날아오르고 있다.
♧ 방가지똥
나는 똥이 아니올씨다
나는 강아지똥이 아니올씨다
애기똥애기똥 피어나는
노란 애기똥풀도 아니올씨다
겅중겅중 방아 찧는
방아개비똥도 아니올씨다.
詩가 맛이 다 같다고
시가 맛이 다 갔다고
조․용․조․용 소리치는, 나는
향기로운 방가지똥
방가지방가지 피고 지는
방가지똥이올씨다.
♧ 회양목
눈발이 흩날리는 이른 봄날에
꽃이 피었는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걸신들린 듯
벌 떼 잉잉거리는 소리
귀가 소란스러워
뒤돌아 자세히 보니 꽃이 피었다
잎도 작고 꽃은 더 작아
부끄러운 듯 부끄러운 듯
선비 사랑채 앞에 자리잡고
은밀하니 꽃을 피웠다
‘참고 견뎌 내라!’고
잉잉대는 벌 떼가 소리칼 잡고
꽃말을 한 자 한 자 새기고 있다.
* 홍해리 시집『정곡론』(도서출판움,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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